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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송희 Apr 23. 2019

맥시멀리스트가 어때서!

미니멀리스트는 지향해야 할 삶의 방식일까?

행거가 무너졌다. 두번째 자취집에 이사 가면서 샀고, 그 뒤 세번의 이사 때마다 재설치한 행거니까 쓸 만큼 썼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낡거나 망가져서 무너진 게 아니라 행거 하나가 지탱할 수 있는 무게를 초과해서 무너졌다고 생각해보면 역시 이 엄청난 옷더미는 문제다.
부엌 수납장 깊숙한 안쪽에 잠들어 있던 도시락 통을 꺼내다가 그 앞에 비스듬히 서 있던 컵이 깨지면서 손을 베였다. 물건을 쌓아놓고 사는 사람들은 가끔 이런 재난을 겪곤 하는데, 쌓여 있던 책이 쏟아지면서 발등을 다치거나 쌓여 있는 물건 사이사이로 이동하다가 다리에 멍이 드는 일도 잦다. 10년 전에 산 옷이 아직도 옷걸이에 걸려 있고, 분명 예전에 산 책인데 어디 있는지 못 찾아서 같은 책을 또 사고, 그릇이나 컵도 그 용도로 사용하는 물건이 있는데도 예쁘면 또 산다. 더 이상 깔 바닥도 없으면서 패턴이 예쁘거나 할인하는 러그를 발견하면 동대문 천장수처럼 또 사 모으고 이제는 더 놓을 데가 없어서 여기저기에 예쁜 천을 두겹 세겹 깔아둔다. 네, 저는 고쳐 쓸 수도 없는 맥시멀리스트입니다. 도와줘요, 곤도 마리에!(일본의 유명 정리 컨설턴트, 넷플릭스에서 사람들의 집을 정리해주는 방송을 진행하면서 미니멀리스트의 대표 격으로 불린다)



죄책감과 싸워야 하는 맥시멀리스트
최소한의 물건만으로 깨끗한 공간을 유지하는 것이 지향해야 할 삶처럼 이야기되고, 서점에 가면 일본에서 건너온 간소하고 조용하고 깨끗한 정리법이나 그러한 공간 유지법에 대한 책들이 쌓여 있다.
사실 나도 좀 따라해보려고 그런 책을 여러권 사 봤다. 그 정리법에 따라 읽지 않은 지 오래된 책은 버리기도 했고, 안 맞는 옷은 정리해서 기부하거나 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 빈자리를 또 다른 물건이 채웠고, 결국 지금 제일 먼저 버려야 할 1순위 책은 그 미니멀리스트 책들이다. 사진은 예쁜데 이제 더 읽지도 않을 것 같으니 얼른 처분해야지. 오래도록 살아온 삶의 방식이라는 건 책 몇권 읽는다고 뜯어고쳐지는 게 아니었다.
아니, 그런데 물건이 많고, 좁은 집에 쌓아두고 사는 게 왜 이렇게 ‘나쁜 삶의 방식’처럼 취급받는 것일까. 나는 내 돈으로 내 물건 사서 내 집에 쌓아두고 내가 볼 때마다 즐거이 누리면서도 왜 마음 한편에 죄책감마저 느껴야 하는가.


맥시멀리스트가 가장 큰 죄인이 되는 날은 누가 뭐래도 이사하는 날이다. 책, 소품, 옷, 패브릭, 그릇, 식물 등 참 다양한 분야의 물건을 좋아하고 사 모으는 나 같은 사람들은 이사 다닐 때마다 이삿짐센터 분들에게 죄인 모드로 종종거려야 한다. 지난번 이사할 때는 센터 직원분이 나 없는 데서 엄마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따님이 공부하는 분이세요? 책이 참 많네? 근데 디자인도 하시나? 옷이 왜 이렇게 많아? 혼자 사는데 뭐 이렇게 그릇이 많아? 이거 정말 다 가져갈 거래요? 좀 버리지.” 도대체 직업이 뭐길래 이렇게 잡동사니도 많고 책도 많고 옷도 많고 식물도 그릇도 많은지 묻는 낯선 사람의 질문에 엄마는 얘가 평범한 직장인이라고 말하기가 부끄러워서 그냥 대학원에 다닌다고 답해버렸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을 때에는 나 역시 창피해하며 웃었는데, 최근에는 자꾸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왜 맥시멀리스트는 면구스러워해야 하고, 구박을 받아야 하고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가!


이렇게 말하니 내가 돈을 펑펑 쓰고 비싼 물건을 쌓아둔 것 같지만 사실 다 저렴한 것들, 다이소나 자주에서 그나마 내 취향에 맞는 것을 찾아서 구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우리 집에 놀러왔던 친구들은 입을 모아 “좀 버려라” “그만 좀 사”라고 조언하거나, “너 이사 갈 때 어떡하니”라고 진심 어린 걱정을 하기도 한다. 내 집이 아닌 이상 2년에 한번씩 우리는 원치 않는 이삿짐을 싸야 한다. 나 역시 큰 화분을 집에 들여놓을 때마다 생각한다. ‘저거, 이사 갈 때 가져갈 수 있을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내 집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물건을 계산껏 들여놓는 것은 물론 필요한 일이다. 더는 쌓아둘 곳이 없어서 책을 이중 삼중으로 꽂아놓다 보니 필요한데 그 책을 찾기 어려울 때, 그 옷이 입고 싶은데 어디 있는지 찾기 곤란할 때 물론 ‘아, 정리 좀 해야 하는데’ 하고 나도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버리지 못해서 누군가 대신 정리를 해줬으면 싶지는 않다.
넷플릭스에서 정리 컨설턴트 곤도 마리에가 진행하는 프로그램 이름은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다. 곤도 마리에의 정리법인 ‘곤마리 정리법’은 품목별로 물건을 나누고 그 안에서 정리를 해나가라고 조언한다. 옷, 책, 서류, 소품(부엌과 창고에 쌓여 있는 모든 물건), 추억의 물건이 그 품목이다. 그것들 중 버릴 물건을 모으면서 곤도 마리에는 “그동안 고마웠어”라고 말하며 물건을 소중하게 ‘버리라’고 한다. 버릴 물건이니 가차 없이 바닥에 내팽개치는 것이 아니라 소중하게 어루만지며 “그동안 도움을 줘서 고마웠어”라고 말하며 버리라는 것이다.
곤도 마리에에게 도움을 요청한 사람들은 대개 ‘너무 바쁘고 일상에 치여서’ 집을 정리할 수 없었고, 힘든 하루를 마무리하고 퇴근해 지저분한 집에 들어오는 게 너무 스트레스여서 그게 부부싸움의 원인이 되고 일상에 짜증이 잦아졌다며 울음을 터트린다. 이렇게 사는 건 잘못된 것 같다고. 그런 그들을 곤도 마리에는 따뜻한 미소로 감싸 안아주며 “할 수 있어요! 우리 함께 버려요”라고 응원한다.


곤도 마리에의 방송을 보면서 주말마다 나 역시 조금씩 버릴 옷을 꺼내놓곤 하는데 10개 꺼냈다가 1개 버리고 9개는 다시 행거에 올려둔다. “미안해요, 난 아직 틀렸나 봐요. 이거 살 빠지면 입을 것 같아요”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 엄마와 함께 살 때는 “제발 방 좀 치우라”는 엄마와 “이게 치운 거”라는 나의 지난한 싸움이 이어졌다면 지금은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하는 나의 죄책감과 싸운다.


역시 사길 잘했어. 예쁘잖아
곤도 마리에가 죄책감을 강조하기보다는 그들이 원하는 삶의 방식에 가까이 가자고 말하는 반면 맥시멀리스트의 삶을 ‘잘못된 삶의 방식’이라고 판결을 내린 것이 최근 방송된 <에스비에스(SBS) 스페셜―맥시멀리스트를 위한 비움 안내서>다.
맥시멀리스트 여성 두명을 섭외해서 결국 그중 한명이 소비에 집착하게 된 것이 마음의 상처 때문이라고 울면서 고백하게 만드는 이 방송을 보면서 나는 내 삶의 상처를 돌아봤다. 나는 마음의 허전함을 채우려고 물건을 사는가? 이루지 못한 꿈과 도달하지 못한 행복을 소비로 채우고 있는 건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나? 가정이나 사회에서 상처받고, 이루지 못한 직업적 성취나 해보지 못해 아쉬운 꿈이 없는 사람이 있나? 왜 방송 제작진은 여행 가서 모은 예쁜 컵을 자랑하는 사람에게 “결국 쓰는 컵은 하나죠?”라고 질문하는가.
좋아하는 것이 많아서 좋아하는 것을 모았고, 그것들이 쌓여서 내가 되었고 이 집이 되었다. 미니멀리스트가 훌륭한 삶이고, 맥시멀리스트는 고쳐야 할 삶은 아니다. 다만 둘의 삶의 방식이 다를 뿐이다.


내가 사는 공간을 이루고 있는 물건들은 사실 싸구려에 잡다하고 남 보기에는 ‘저런 걸 돈 주고 왜 사?’ 싶은 효용가치 떨어지는 물건들이다. 나는 같은 모양에 무늬만 다른 컵이 여러개 있고, 같은 꽃무늬지만 패턴만 다른 커튼도 여러개다. 고양이가 물을 자주 먹게 하려고 곳곳에 물컵을 놓았고, 고양이용 상자도 방바닥에 굴러다닌다. 물론 가끔 있는 물건을 또 사기도 하고, 정리 안 된 물건을 밟아 발바닥이 뜨끔하기도 한다. 하지만 오랜만에 여유가 생긴 주말에 쌓인 빨래를 세탁기에 돌려놓고 ‘나만 어디 있는지 알게’ 나만의 지저분한 방식으로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나는 다시 흐뭇해진다. 역시 그때 이걸 사길 잘했어. 너무 예쁘잖아. 역시 이건 내가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아름다움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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