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연가
2000년도 시작하며 대히트를 친 드라마 [가을동화] 아직도 원작은 못 보고 원빈의 성대모사만 기억하는 이가 많은 이 드라마의 성공을 뒤로하고, 가을동화의 연출자 윤석호 PD는 차기작으로 사계 시리즈를 줄줄이 만들어 내게 된다. 가을동화-겨울연가-여름향기-봄의 왈츠.
이 사계절 드라마 중에 시청률로 따지면 가장 히트했던 드라마는 [가을동화]지만, 티비 드라마 업계와 문화계전반에 미쳤던 영향력으로 따지자면 가장 크게 히트한 드라마는 모름지기 [겨울연가]가 아닌가 싶다. MBC 상도, SBS 여인천하라는 박빙의 동시간대 대 사극과 경쟁을 했던 멜로드라마 이면서도 시청률 20% 이상을 가뿐하게 넘겨 유지하여 2002년 월드컵 시즌이었던 해에 시작을 신드롬으로 물 드린 것은 물론, 다음 해 일본에서 [겨울소나타]라는 드라마로 방영을 시작하면서 '보아'와 함께 1기 한류 열풍을 몰고 온 주역이라고 볼 수도 있다. 배우 배용준을 여전히 '욘사마'로만 어렴풋이 기억하는 '한국인'이 있을 정도이니 이 드라마의 영향력은 정말 길고도 길었다. (심지어 25년 겨울엔 겨울연가를 원작으로 하는 일본 영화도 개봉예정이란다.)
한국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클리셰 여기 다 모아놨어요!
같은 PD가 연출한 전작 [가을동화]는 병원의 실수로 뒤바뀌어 버린 아이를 소재로 해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결국 남매로 자란 온, 두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해서 한국 티비 드라마에서 그 뒤로 줄줄이 '출생의 비밀'클리셰가 다양한 방식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더불어 (사실은 아니지만) 이어질 수 없는 (남매간의) 사랑, 불치병까지. 클리셰의 기초를 다졌다면, 겨울연가에는 한층 더 업그레이드되어 초석을 다지게 되었다.
첫사랑, 출생의 비밀, 기억상실, 마지막엔 불치병까지. 지금 이 모든 소재를 한 드라마에 때려 넣게 되면 사람들은 1화 만에 스트리밍을 꺼버릴 것이다. 미래가 이미 다 예측이 되기 때문. 그만큼 이제는 진부한 클리셰가 되어버렸지만, 이 당시에만 해도 이토록 애절하고 절절한 사랑을 그리기에 적합한 소재가 없었다. 그러니 이 소재들을 모두 클리셰로 만들어 버린 원흉이 어쩌면 이 [겨울연가]가 시작이었을지 모른다.
줄거리.
춘천의 고등학교 동급생인 유진과 상혁, 그리고 어느 날 전학 온 준상. 상혁은 오래전부터 유진을 짝사랑해 왔지만, 유진은 전학 첫날부터 자신과 엮기게 되는 준상을 신경 쓰게 되고 결국 두 사람이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며 첫사랑으로 기억하게 된다. 그러던 중 유진과 만나기로 약속한 어느 날, 준상은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고 교통사고를 당하게 된다. 이로써 친구를 잃은 동급생들을 준상을 추모하며 그 시절의 기억을 마음에 묻게 된다.
세월이 흘러 28살이 된 유진은 상혁과 결혼을 약혼한 사이가 되었고, 약혼식 당일 준상과 똑같은 모습의 남자를 우연히 마주치고 뒤쫓아 가느라 약혼식에 늦고 만다. 알고 보니 준상과 똑 닮은 남자는 그 시절 동창이었던 채린의 남자친구인 민형이었고, 미국에서 쭉 살다 건설시공사 대표로 한국에 들어오게 된 것. 게다가 그는 건축가인 유진과 일적으로도 얽히게 되어 함께 일을 하게 된다. 첫사랑과 닮은 남자를 보며 마음이 흔들리는 유진. 그리고 그런 유진을 보며 끌림을 숨길 수 없던 민형. 두 사람의 미래를 어떻게 바뀌게 될지...?
딱 초등학교 6학년이 되던 시절, 그러니까 영어 나이로 teenager에 들어가는 때에 이 드라마를 봤었다. 28살이었던 주인공 유진이 아주 큰 어른처럼 느껴졌고, 심지어 유진이는 유능한 건축가인 데다 똑 부러지게 말도 잘하는 커리어우먼이었다. 나이가 들어 어른이 되면 '꼭 저런 멋진 사람이 되어야지!'라고 다짐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히 머릿속에 남아있다.
그러나, 주인공 유진이의 나이를 훨씬 더 넘어 버린 지금. 비록 유진이처럼 멋진 전문직을 얻지도 못했고, 가슴 절절한 첫사랑과 이어지지도 않았지만 그럼에도 유진이가 하나도 부럽지 않았다. 다시 본 유진이는 내가 어릴 적 꿈꿨던 '멋진 사람'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때는 몰랐던 드라마의 다른 부분이 너무나 많이 보여서 드라마를 다시 정주행 하기가 불편할 정도였다. 아름다운 첫사랑 찾기에 재 뿌리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은 건지.
왜 여자 주인공은
마음대로 살면 안 되나요?
이 드라마에서 유진이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유진이의 첫 사랑한 준상이도 유진이를 사랑했고, 오랫동안 유진이를 짝사랑한 상혁이도 유진이를 사랑했다. 그 모습을 시기했던 채린이도 유진이를 동창 친구로 오랫동안 곁에 두고 지냈고, 단짝인 진숙이와 용국이는 당연히 그랬다.
심지어 기억을 잃었던 준상, 민형이도 유진이를 다시 사랑했고, 당연히 유진의 부모님도 유진을 사랑했다. 예비 며느리로 여겼던 상혁의 부모님도 어느 면에서는 못마땅해하는 부분이 있기는 했으나, 이미 약혼까지 했으니 우리 가족으로 받아들인다면서 사랑해 왔다. 그런데 어째서, 아무도 유진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유진이 조차도 자신의 마음에 확신이 없어 언제나 흔들렸고, 유진이를 에워싼 모두는 유진이를 지극히 사랑하기 때문에 각자의 방식을 유진이를 괴롭혔다. 이건 명백히 따지면 사랑이 아니라 폭력에 가까웠다.
1. 짝사랑도 오래 하면 공로상을 주나요?
상혁이는 극 중 부모님끼리 친분이 있던 유진이네와 아주 오래전부터 친분을 유지한 걸로 그려진다. 그러니 상혁이 인생에서 정말 여자는 유진이 하나뿐이었던 것. 이성에 눈을 뜨고 난 뒤로부터 유진이를 가족처럼 애인처럼 아껴왔을지 모르겠지만, 유진이의 마음은 그와 같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유진이를 좋아했고 그 마음으로 유진이를 아껴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상혁이는 모든 상황과 설정에서 다른 인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다. 동시에 그렇기에 유진이가 상혁이와 생각이 다르거나 마음이 다르다는 걸 말하게 되면 세상 둘도 없는 나쁜 년이 되어 버리는 셈이었다.
결혼을 약속할 만큼 신의를 가지고 있어온 관계를 종료하게 된 것은 인간적인 도리로 비난받을 만 하나, 그것이 유진이가 이 세상 모두가 공노 할만한 대역죄를 진 것은 아니지 않나. (물론 자신의 마음을 제 때, 제대로 말하지 않은 것이 유진의 가장 큰 죄이지만) 유진이가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지도 못하게 상황을 설계한 것이 상혁이 지독한 짝사랑이 아니었나. 생각해 보면 오래된 짝사랑은 공로상이 아니라 오히려 가스라이팅의 일종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2. 세상 사람들 앞에서 세우는 체면이 밥 먹여주나요?
유진의 마음이 흔들리는 걸 알아챈 상혁은 가족과 친구들까지 모두 모아놓은 (자신이 PD로 진행하는 프로그램) 방송에서 공개적으로 프러포즈를 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 프러포즈에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는 유진. 그 모습을 예비 시어머니가 추궁하게 되고, 그 상황에 민형이 나타나 유진은 잘 못이 없다고 두둔하기에 이른다. 이때 내가 가장 경악했던 부분은 유진의 엄마마저도 유진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후반부에 상혁은 결국 유진과 헤어지고 병이 들어 병원에 실려가기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고, 상혁의 어머니가 찾아와 빌기에 이른다. (와우...) 이때도 유진의 어머니는 유진의 마음에 손을 들어주기보다는 '사돈댁 앞에서 어떻게 얼굴을 드나'며 상혁의 편을 들어버린다. 아니 대체 남녀가 만나다가 마음이 틀어지면 헤어질 수도 있지. 고작 20년 전 드라마인데, 얼마나 우리가 남녀 관계에 대해서 보수적이었는지 드라마를 보면서 새삼 또 깨달았다.
(심지어 유진과 준상이 일하는 스키장에 폭설이 내려 산 정상 오두막에 갇혀 하루를 보내고 내려온 탓에 유진은 모두에게 비난을 받게 되고, 상혁은 이때의 일을 빌미 삼아 유진과 억지로 하룻밤을 함께 보내자고까지 한다. 이 시절 드라마는 현시점 범죄와 폭력 사이를 가로질러간다.)
3. 아니, 유진이의 미래를 왜 너네가 결정하는데?
사실상 기억을 잃은 준상이었던 민형. 민형이는 극 중 초반 유진을 좋아하게 되면서 끊임없이 같은 말을 반복한다. 이미 결혼을 약속한 상혁과 사귀고 있는 상태였고 자신도 채린과 교제를 하고 있는 중이었으니, '선택은 유진 씨의 몫'이라는 말. 유진이가 자신을 선택한다면 언제든 모든 걸 버리고 뛰어들 태세를 갖추고 한 말이었다. 그러나 이 얼마나 회피하고, 자신 없는 고백인가. 한탄스러운 말이 아닐 수없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기억을 찾고 난 뒤에 민형, 다시 말해 돌아온 준상은 한 술을 더 뜨게 된다. 준상임을 알고 온 마음을 다해 직진하는 유진과 달리 기억상실로 인해 자신의 한계를 느끼거나, 출생의 비밀을 어렴풋이 알게 되거나, 자신의 불치병에 대해서 알게 되거나, 때때마다 준상은 유진을 놓친다. 아니 버린다에 가깝다. 항상준상은 도망을 가거나, 심지어 유진의 행복을 빈다며 상혁에게 유진을 맡긴다. 상혁이 아니라 준상을 선택한 유진의 마음이나 선택은 두 남자 모두에게 들리지 않는 것 처럼 말이다.
'너를 위한다'는 핑계로, '너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 사람의 이야기를 철저하게 외면해서 이 상황을 더 애절하게 만드는 게 지금으로선 너무나 마음이 아프다. 답답해서, 심근경색올 것 같아서 아프다.
겨울연가도 이번 웨이브 뉴클래식프로젝트에 라인업 중에 언젠가는 오를 것으로 예상이 된다. 그만큼 히트한 작품이면서 여러모로 영향력이 컸던 드라마인 만큼 새롭게 연출된 드라마를 보는 재미도 쏠쏠할 것 같다. 물론 그시절 이 드라마를 보면서 마음 졸이고, 가슴 아파했던 기억도 여전하다. 이 시대에는 완전히 소멸되어 버린 것만 같은 '첫사랑'이라는 풋풋하면서도 가슴 저릿한 감정을 극 서사로 잘 그려냈다는 점도 이 드라마의 훌륭한 매력 포인트였다.
그러나, 20년이 흘러 우리 사회에 너무 많은 변화가 있었다. 지금 세상에 28살 유진이는 사회 초년생일 확률도 너무나 높아졌고, 돌싱남녀가 넘치는 세상에 약혼은 너무 고리타분하다. 그러니 지금 세상 입맛에 맞는 그리고 '너'와'나'를 모두 존중하는 연애시대에 과연 [겨울연가]는 어떤 재편집으로 세상에 다시 공개될지 무척이나 궁금하고 또 염려와 기대가 동시에 된다. 부디 유진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드라마 내내.
첨언.
최지우 배우님이 연기하는 그 시절 티브이 드라마들은 어쩜 이렇게... 비슷한지 모르겠습니다. (예. 천국의 계단) 2010년대 이후에도 드라마 작품을 해주셔서 또 다른 캐릭터로 남게 되어 감사할 따름입니다.
사진 출처. 드라마 공식홈페이지 (https://program.kbs.co.kr/2tv/drama/winter)
관련 사진. 기사사진 _ 팬엔터테인먼트 제공
유튜브 영상. https://youtu.be/QLuSOWqXWLU?si=Isuou1LyRH6QhEi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