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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잃은 것

총 여섯 가지 분실물

by 이솔

회사에서 아끼던 목도리를 잃어버렸다. 엄마에게 받은 진한 회색의 체크 목도리였다. 내 돈 주고 살 일 없는 무려 빈. 폴. 목도리였단 말이다. 분명 사무실 책상 위에 올려 두었는데 다음날 출근하니 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한 달 내내 툴툴거렸다.


“내가 제일 아끼던 목도리를 대체 누가 훔쳐 간 거람.”


언어학자 에드워드 사피어와 벤저민 리 워프가 제시한 ‘언어가 사고를 형성한다’는 일명 사피어-워프 이론처럼, 나는 잃어버린 것에만 집중하다 문득 회사에서의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님을 깨달았다.

일을 하다 말고 펜을 들어 다이어리 맨 뒷장에 텅 빈 페이지를 폈다. 그리고 회사에서 잃어버린 것들을 전부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첫째, 비타민 D

해가 뜨기 전 출근해서 해가 다 지고 나서 퇴근하니, 만성 비타민 D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둘째, 만성 위염

밥 먹고 가만히 앉아 노트북만 하다 보니 내장의 소화 능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거기다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하면 너무 쉽게 위염이 생겨버리는데, 스트레스를 풀겠다고 매운 음식까지 들이부으니 어쩔 수 없이 만성 위염을 달고 살 수밖에.



셋째, 자존감 저하.

아마 모든 직장인의 고질병일 테다.

만약 내가 어찌저찌 직장생활의 (얕은) 맥을 유지해 높은 자리에 앉게 된다 해도, 자존감은 계속 깎일 것이다. 사실 내 자존심을 깎아내리는 건 상사가 아니라,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넷째, 건강 체중.

회사에 다니고 15킬로그램이 쪘다.

나의 반경 5km 지인 기준의 스몰 데이터에 의하면, 세상엔 딱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힘들면 살 빠지는 사람, 그리고 찌는 사람. 난 후자다.

그러니까 컨디션이 좋지 않아 큰 병에 걸린 거 아닌가 싶다가도, ‘급격한 체중 감소’라는 항목만 보면 건강하다는 걸 깨닫는 류의 사람인 것이다. 몸과 마음에 여유가 없으면 무감각해져 많이 먹고 뒤룩 찐다.



다섯째, 하체 혈액순환 질병(?)

차마 브런치에 적기엔 부끄러운 질병에 걸렸다. 입사 2년 차 겨울에 처음 증상이 시작되었는데, 평생 고통받은 적 없는 부위에서 고통이 시작되었다. 아무래도 추운 겨울에 같은 자세로 오래 앉아 있다 보니 혈액순환에 문제가 생겼던 모양이다. 수술을 받기 위해 병명을 알리고 병가를 내는 건 유난처럼 느껴졌던 말단 사원 시절이라, 홀로 고통받았더랬다.

다행히 찜질을 시작하고 광명을 찾긴 했지만, 그날의 칼날 같은 고통은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다.




반추해 보니 회사에서 잃어버린 것은 목도리뿐만이 아니었다.


느닷없이 떳떳한 기분이 들었다. ‘이 많은 걸 잃고도 그만두지 않고 다니는 나에게 고마워해라’ 따위의 갑 마인드가 함양되는 순간이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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