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비실 간식 모으는 스킬
직장인이 된 지 5년째다. 초등학생으로 치면 졸업할 때가 다 된 건데, 잘하게 되었다고 자부할 수 있는 일은 손에 꼽는다. 그마저도 ‘회사에서 살아남기’ 같은 B급 만화책에 삽입될 정도로 허접한 잔스킬들이 대다수다.
최소한의 에너지를 쓰며 리액션하기
PPT 깔끔하게 만들기
탕비실 간식 티 안 나게 많이 모으기
택시나 식당에서 상석 파악하기
회의실의 대세 의견 파악하기
… (외 다수)
광고 회사 브랜딩팀에서 일하면서 그나마 터득했다고 자부할만한 스킬이 있다면 그건 바로 말을 정제하는 능력이다.
프로젝트를 할 때 기업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진행하는데, 한 프로젝트에 보통 다섯 개에서 열개 그룹의 인터뷰를 진행한다.
인터뷰이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화두를 이끌어 가는 것은 상사분들의 몫이다. 막내인 나는 그걸 토씨 하나 안 틀리게 기록한 다음, 제삼자가 읽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갈고닦는다. 발화자의 의도가 분명히 이해될 수 있도록 문장 구조를 다듬고, 적절한 단어로 바꾸고, 중복되는 이야기는 합치거나 삭제한다. 인터뷰 자체는 한 시간 만에 끝나지만 스크립트 정리하는 데에는 꼬박 세 시간이 든다. 지금까지 백 개가 넘는 인터뷰 스크립트를 정리했으니 스크립트 정리에만 수백 시간은 썼을 것이다.
간혹 인터뷰는 시간 낭비고 스크립트 정리는 더 쓸데없는 일이라고 취급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인터뷰는 프로젝트를 진행함에 있어서 브랜딩의 단초를 찾을 수 있는 중요한 작업이다. 구성원이나 키맨의 말속에 정답이 숨어있는 경우 많다. 말을 정제하면 그 안에 브랜드의 본질이 될 단초가 있다. 우리 세상에 아주 새로운 개념은 없다. 때문에 광고니 브랜딩이니 하는 것들은 결국, 이미 존재하고 있지만 의미를 잃은 채 버려진 단어를 찾아 빛을 내는 작업이라고도 볼 수 있다.
두서없이 나온 말들로 빼곡한 열다섯 장짜리 1차 스크립트를 네 장으로 제련한다. 그들의 말을 내 입맛대로 가장 매력적이고 효율적으로 바꾸면서 쾌감을 느낀다.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 중 나는 문장을 다듬을 때 가장 평안하다. 클라이언트도 상사도 일일이 맞는지 틀렸는지 평가하지 않으니 이때만큼은 자유다. 내가 정리한 스크립트가 정답이 된다.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 좋다.
인터뷰할 땐 말을 제법 잘한다고 느꼈는데, 막상 스크립트로 옮겨보면 완벽한 문장을 구사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귀로 들을 땐 자연스러웠던 사람의 언어도, 텍스트화시켜 보면, 중복되거나 틀린 단어가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좋은 목소리와 자신감 있는 언변은 그 사람은 충분히 매력적인 스피커로 보이게 했다. 말을 완벽하게 하는 사람은 없다. 자신 있는 태도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명확하다면 말은 잘 전달된다. 그러므로 나는 스크립트를 정리하며 용기도 얻었다.
아직까지 인터뷰 정리 말고는 잘한다고 자부할만한 게 없다. 아직 없는 것인지 영영 없을 것인지 모른다.
나중에 팀장이 되었을 때, 지금 팀장님만큼 내가 할 수 있을까.
1초의 고민도 없이 말할 수 있다. 자신 없다.
당장 차장님 발끝만큼도 따라가지 못한다. 차장님께 들어보니, 차장님도 나중에 팀장님처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하신다. 내 옆에 나와 연차가 같은 동료에게도 물었다. 그도 나와 같은 고민을 한다고 말했다.
아아 이 고민은 끝이 없겠구나. 계속 스스로를 다그치며 살아가겠구나. 계속 땅 위에 발을 딛지 못하고 까치발을 들며 살아가겠구나.
빠른 현실 자각 능력과 이젠 애착 인형이 된 불안까지.
적어도 이 정도는 회사 생활을 하면서 얻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