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내가 틀렸다
2025년 1월 1일에 딱 한 가지 다짐한 것이 있다. 올해는 나의 관성을 깨보리라.
보통이면 ”아 난 그런 거 안 해”라며 피해 왔던 것들에 대해 별 고민 없이 응해보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았던 초봄, 평소라면 절대 나가지 않았을 술자리에 나갔다.
지인 2명이서 술을 마시다가 내 생각이 났다며, 심심하면 들르라는 전화를 받은 것이다. 그것도 퇴근 시간에, 게다가 화요일이라는 애매한 날짜에, 심지어 많이 친하지 않아 진짜로 찾아갔을 때 당황할 것 같은 사람이 말이다. 갑작스러움과 부담스러움이 싫어 관성대로라면 NO 했을 테지만, 새해 다짐을 2월부터 깨버릴 수 없으니 3호선 열차에 몸을 실었다.
종로 3가의 어느 술집, 하이볼 한 잔씩을 걸친 그들은 내 몫의 안주 한 그릇을 남겨둔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셋이서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A가 요새 좋아하게 된 사람에 관한 이야기, 언제나 어렵기만 한 돈 버는 이야기, 충직한 강아지에 관한 이야기. 인생에 대한 진중한 대화 같은 건 없었지만 소소한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다행히 걱정했던 것만큼 어색하진 않았다. 나의 우려 중 적중한 것은 단 한 개도 없었다.
“담배 피우러 갈래?”
나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비흡연자이지만 내친김에 평소와 완전히 다른 짓을 해보고 싶었다. 좁은 흡연실에 셋이 다닥다닥 붙어 뿌연 연기를 내뿜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림이었다. 루틴에서 벗어나 트랙을 이탈했다는 흥분이 나를 감쌌다. (오랜만에 태운 연초에 머리가 해까닥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2차로 4,900원짜리 싸구려 하이볼과 새우가 8개 들어간 크림 쉬림프까지 먹은 다음 웃으면서 헤어졌다.
같이 저녁 먹고 가겠냐는 회사 동료 J의 제안에도 쉽게 응했다. 무조건 집을 빨리 가는 것을 덕목으로 아는 나와 달리, J는 혼자 밥 먹느니 집에 늦게 가는 걸 택할 사람이다. 평소대로라면 집에 배추찜 재료를 손질해 놓았다며 저녁 자리를 피했겠지만, 올해는 냉장고에서 채소가 썩어가고 있는 피치 못할 사정이 아니라면 J와 저녁을 함께했다. 요리해 먹고 침대에 눕는 즐거움과는 또 다른, 사람에게서 받는 즐거움이 있었다.
가을에는 8년 만에 연락온 대학교 동창과 만났다. 수업 때는 친하게 지냈지만 막상 개인적으로 연락은 거의 하지 않던 친구였는데 갑자기 만나자는 카톡을 보내온 것이다. 결혼 혹은 사이비 혹은 보험이면 어떡하지 걱정했던 것이 사실이나, 다행히 그런 불순한 목적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 순수하게 내가 잘 지내나 궁금했던 것이다(!). 별 탈 없이 과거의 나를 아는 이와 즐거운 조우를 나누었다. 회사 5년 차이고 태국 빠이를 좋아한다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4시간 동안 떠들었다. 그는 내가 8년 전에 보냈던 카톡을 보여줬는데, 걱정했던 것보다 대학생다운 귀엽고 착한 내용이었다. 당시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며 인성이 파탄나 있었다고 기억했는데, 그래도 조금은 괜찮은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겨울의 문 앞에서는 친구가 건넨 러닝 제안에 응했다. 보통의 나는 평일 약속을 잡지 않는다. 언제 야근이 생길지 모르니 서로 얼굴 붉힐 일 없이 그냥 맘 편히 안 잡는 편이다. 게다가 운동 신경이 안 좋은 편이니 러닝은 도전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고정관념을 버리기로 약조했으니, 대충 회색 츄리닝과 후드티를 챙겨 입고 한강 공원으로 향했다. 가는 길 내내 이게 잘한 선택일지 고민했다.
첫 기록은 나쁘지 않았다. 인터벌로 뛰긴 했지만 1km에 7분 30초가 나왔다. 생각했던 것만큼 끔찍한 수준은 아니었다. 이날 이후 기록 깨기에 재미를 붙인 나는 달리기를 계속했다. 얼마 전 5km를 멈추지 않고 뛰었고 무려 6:40초대라는 개인 최고 기록을 달성했다.
나도 내가 이럴 줄 몰랐다.
관성에서 벗어나는 건 결국 내가 틀렸다는 걸 알게 되는 일이었다.
'원래 이런 사람'은 없는 거다.
내가 만든 나만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