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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mi Lee Mar 18. 2023

엄마가 딸을 서울대 보낸 비법

 사실 아빠 엄마가... 물론 나와 동생에게 최선을 다했겠지만, 어떤 기준으로 봐서는 최선이 아닐 수도 있다는, 어쩌면 조금 모자라게 키웠단 사실을, 우리 모두 인정을 하는 편이다. 특히 요즘 나오는 입시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드라마나 뉴스를 보면 더욱 그런데, 그에 비해 누구에게 피해 주지 않고 부모님께 걱정 끼쳐드리지 않고 야무지게 잘 살고 있는 우리 자매는, 들어간 인풋에 비해 가성비가 좋은 자녀들인 것 같다.     

 

 이를테면 나와 동생은, 엄마의 손에 이끌려 학원을 가 본 적이 거의 없다. 나는 학원을 보내 달라고 조르고 졸라 겨우 태권도를 배우게 되었고, 나중에는 태권도로 쌓은 기초체력을 바탕 삼아 (또 겨우 졸라) 우슈 체육관을 다니게 되었는데 그로 인해 우슈 선수가 되었고, 북경체육대학교로 진학을 하며, 입시학원을 다니기는 커녕, 수능도, 모의고사도 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나는 중국이라는 나라에서 무협영화에 속에 나오는, 무술을 잘 하는 멋진 ‘강호인’이 되겠다는 꿈이 있었다. 그래서 중학생 때부터 새벽 6시에 EBS 교육방송에 나오는 <중국어회화> 프로그램을 챙겨 보았고, 고등학생이 되어 중국으로 대학을 가겠다고 마음 먹은 후에는 스스로 그 당시 창원에 몇 군데 없는 중국어학원을 알아보았다. 그것이 성에 차지 않아 중국어 과외를 알아보려 했는데 선생님 구하기도 쉽지 않아 직접 동네 농협 벽보에 “중국어 과외 구합니다”라고 쓴 오징어 다리 전단지를 프린트 해서 붙일 정도였다. 물론 엄마는 내가 공부나 곧잘 잘해서 한국의 좋은 대학교를 진학하고 평범한 직장인이 되길 바랬겠지만, 나는 그렇게 고분고분 엄마 말을 듣기엔 가슴 속에 품은 꿈이 너무나 원대했다(무술인이 되겠다는). 내가 뭘 하고 싶다고 말할 때마다 미간에 주름짓던 엄마는 이제 와서 내가 이렇게 자유롭게 사는 것을 보고, 내가 시대를 앞서갔다거나.. 뭐 그런 말로 대충 엄마의 죄책감이나 책임감 같은 감정을 무마하려고 하는 듯하다.   

  

 동생은 더욱 심각했다. 나와 여섯 살이나 차이가 났기 때문에 엄마는 나보다 더욱 동생을 덜 챙겼다. 동생도 난이도가 독특했다. 동생이 초등학생, 내가 고등학생이던 시절, <고스트 바둑왕> 이란 만화책을 보고 바둑학원을 다니겠다고 설쳤고, 바이올린 영화를 본 후엔 바이올린을, 플룻 만화를 보고선 플룻을 불어야 겠다고 왕왕댔다. 동생이 동네 학원에 전화를 해 수강료가 얼마고 초등부는 몇 시에 가면 되냐고 물으면, 동네 학원 선생님은 동생에게, “부모님께 말씀 드린 후에 전화를 주시라고 하라”고 했다. 동생이 장난치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그러면 일 나간 엄마를 대신해 내가 동생 학원에 전화를 걸어주었는데, 그나마 이미 고등학생이나 된 내가 점잖게 “동생이 초등학생인데 학원을 다니고 싶어한다, 부모님이 바쁘셔서 대신 전화한다.”고 얘기하면 그래도 꽤 성의있는 답변을 받을 수 있었다. 우리는 동네 학원 몇 군데를 물색한 다음 시간과 비용, 그리고 인지도를 종합적으로 평가를 한 후에, 동생이 플룻을 왜 배워야 하는가, 플룻을 배움으로 해서 얻는 효과가 무엇인가에 대해 브리핑을 했다. 그 결과가 합당하면 엄마의 지갑을 열 수 있었다.

     

 동생이 고등학생이 되자 본인은 미술 전공을 하고 싶다고 했다. 앞으로 무얼 하며 살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과목 중에 미술이 가장 흥미롭다고 하고, 어릴 적부터 끼적거리며 그림을 그리거나 색칠을 하는 것을 좋아했기에 나는 나름 동생이 소질이 있을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판단하여 입시 미술학원을 알아보게 되었다. 동생이 알음알음 한 곳을 알아봤는데, 동네에서 나름 큰 곳이었고, 서울의 학원과 연계를 하여, 방학 때는 서울에서 특강 강사님이 내려오거나, 서울로 단기 유학을 간다고도 했다. 나는 다른 걸 떠나서, 가장 중요한 시기에, 자신이 해보고 싶은 것을 최선을 다해 해보지 않으면 후회할 것이라며 부모님을 설득했고, 결국 동생은 고등학교 3년동안 입시미술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의 예상을 넘어서, 동생은 이화여대에 합격을 하게 되었다. 동생이 이화여대에 입학했다는 플래카드가 학원과 학교에 붙었고 가족들도 다들 기뻐했는데 단 한 사람, 동생 본인만은 그것에 만족하지 못했는지 대학생활을 즐겨야 하는 애가 주말마다 집에 내려오는 것이었다. 동생은 서울대에 한 번만 더 도전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부모님은, 충분히 좋은 대학을 갔는데 왜 굳이 또 고생을 하냐며 만류했다. 그렇지만 동생은 압구정동의 손바닥만한 고시원으로 들어가 또 그 힘든 수험생활을 시작했다. 부모님이 서울에 올라오지 못해서 서울 입시학원의 학부모 상담은 내가 대신했다. 부모님 대신 가끔 서울에 올라가서 볶음밥을 해 주며 동생의 뒷바라지를 한 것도 나였다. 고시원은 두 명이 누울 공간이 도저히 없어서, 나는 며칠 단위로 옆 방을 끊어, 습하고 눅눅하고 창문 없는 방에 지내며 동생이 실기시험을 보는 날까지 함께 있어 주었다. 두 사람이 누울 공간이 겨우 나오는 원룸을 알아 보았으나 2009년 당시 월세가 80만 원 이었다. 나는 그 돈이 아쉬워서 대충 몇 개월만 고시원에서 고생하자 했는데, 이담에 열심히 살아서 최소한의 원하는 의식주는 해결할 수 있는 인간이 되고 말리라 다짐을 했다. 마침 나는 대학원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을 때였고 서울에 있는 대학 도서관을 돌아다니며 논문 자료들을 구하던 때라 한량처럼 동생 옆에 비비고 앉아서 서울생활이나 만끽하고 있었다.

 그 때 동생은 인간의 모습이길 포기하고 인간의 먹거리를 다 포기한 채 대충 씻고 대충 먹고 자는 둥 마는 둥 하며 공부와 미술실기에만 집중했다. 하루는 고시원 방 문을 열자 바지를 벗는 모양으로 그대로 침대에 나동그라져 있는 동생을 발견했는데 나는 동생이 죽은 줄로만 알고 식겁했었다. 다행히 만져보니 아직 살갗은 뜨끈했고 살아 있는 모양으로 관절이 움직여서 바로 뉘여주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얼마나 인간이 피곤했으면 바지를 벗느라 잠시 머리를 닿은 사이에 잠이 든단 말인가.

 그런 동생이 각고의 준비 끝에 미술 실기 시험을 보는 전날, 나에게 4B 연필을 좀 대신 깎아 달라고 해서 나는 손이 발이 되도록 정성을 들여 한 자루 한 자루 세심하게 연필을 깎아 주었다. 그런데 무려 4B 연필 60자루를 깎으라고 줘서, 결국 내 엄지손가락의 손톱과 살 사이가 벌어져 버렸다. 한 인간이 시험 한 번 쓰는데 일어날 수 있는 각종 변수가 얼마나 많다고 무려 60자루를 준비해 간단 말인가.

 실기를 치는 날 아침, 24시간 콩나물 해장국 집에서 식사를 간단히 마치고 택시를 타고 실기장까지 갔다. 동생을 짐을 들어 주려고 서울대학교 교정을 따라 들어갔는데, 나에게 손을 흔들고 줄을 서서 시험장으로 들어가는 동생을 보니 왠지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옆을 둘러 보니 수험생들의 엄마로 보이는 아주머니들이 나와 함께 서서 눈물을 짓고 있었다.

 그렇게 여차저차 해서 동생이 서울대학교에 합격을 했다. 동생이 미용실에서 머리를 하고 있을 때 합격 통보를 들었다고 했다. 동생은 머리하다 말고 울었고, 가게를 보던 엄마는 그 소식을 듣고 오열하며 울었다. 우리 집안에 처음 나온 서울대생이었다. 우리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냥 동생이 공부를 열심히 하길래, '흠. 그래 저렇게 열심히 사는 삶의 자세라면 나중에 무슨 일을 해도 굶어 죽지 않고 살겠다' 하는 정도로 생각했다. 아빠는 동생에게 파이팅을 주려고, 서울대만 합격하면 '차를 한 대 사 주겠다', '해외 여행을 보내 주겠다' 공수표를 날렸다가 막상 동생이 합격을 하니 진짜 합격할지 누가 알았겠냐며 오리발을 내밀었다.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부모님은 우리에게 그저 기본적인 것을 해 주었는데, 그 기본적인 것이 사실 얼마나 어려운 지, 평범한 집안이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 우리는 이제 다 커서 알만큼 안다. 누구는 부모님이 대학 입시를, 누구는 부모님이 취업을 알아봐 준다고도 하고, 또 그 줄이라는 게 없으면 힘들다고도 말하는데 지방 소도시에서 커 온 우리 자매는 그런 것들이 잘 와 닿지가 않는다. 만일 아빠가 짬뽕집을 하면 짬뽕 만드는 기술을 잘 아니까 자식에게 더 많이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아빠가 연예인이면, 아빠가 의사면, 좀 더 전문적인 지식과 노하우를 전수해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는 생각한다. 물론 편법을 쓴 얘기는 말도 안 되는 거니까 그냥 빼기로 하고.

 물론 나에게도 그런 기회가 있었다. 부모님이 10년 넘게 동네 슈퍼 장사를 하셨기 때문에 만일 내가 편의점을 연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입지선정부터 재고관리, 마진율에 따른 상품 배치까지 망하지 않고 살아남을 방법이 훤하게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다. 동생도 음식점이나 카페를 가면 '인테리어 비용이 얼마가 들었겠고, 테이블 당 객단가가 얼마, 회전율을 생각한다면 한 달 평균 수입이 어느 정도 되겠네. 아니, 이렇게 큰 카페 부지는 대체 언제 투자원금을 회수하는 거지?' 와 같은 계산을 심심찮게 해 본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부모님에게로부터 물려받은 장사하는 기질보다 각자의 길을 가기를 택했고 자신의 일에 그저 최선을 다했고 최선을 다한 만큼 다행히도 운이 붙어 주어 여지껏 먹고 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부모님은 어릴 적부터 모든 일을 우리에게 다 자주적으로 하게끔 만들어주고 스스로 선택한 일이기에 알아서 마무리까지 하도록 했고, 그리고 아무 디테일도 관여하지 않으셨다. 아니, 오히려 부모님이 우리에게 주셨던 동력은, 열심히 하라고 부추겼던 것보다, 하지 말라고 말렸던 것이 아닐까 싶다. 실컷 재밌는 무협 비디오를 다 빌려 보게 해주고선, 무술을 하지 말고 공부를 하라니! 실컷 공부 다 해 놓았더니, 서울대 가지 말고 이화여대에 만족 하라니! 어쩌면 우리 안에 있던 청개구리 심리가 발동을 했을 지도. 열심히 하고 있는데 더 열심히 하라고 하면 기운 빠지는 것처럼, 부모님은 한 번도 우리에게 더 잘해서 더 높은 목표를 바라보라고 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살았던 이유는 아마도 아빠와 엄마가 늘 최선을 다해서 살며, 어떻게 사업을 지킬까 고민하는 자세를 보여준 덕분이 아닐까 싶다. 밤 12시가 넘어 가게를 마치고 들어와서도 아빠 엄마는 식탁에 앉아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좁은 집에서 우리는 매일 밤 아빠 엄마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무슨 고민을 하고, 어떻게 헤쳐나가는지를 들으면서 컸다.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했고, 부모님은, “아이들 때문에 가게 문 닫습니다” 하는 적 한 번도 없이 오랜 세월 손님들이 슈퍼를 지나치며 헛걸음을 하지 않도록 그 자리를 지켰다. 그저 부모님이 부모님 자리에서 부모님으로서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니, 우리도 최선을 다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혹은 최선을 다해 사는 귀한 유전자를 물려 받았거나.


 그래서 종종 엄마가, 지인들에게 자녀들 입시에 대한 상담을 받는다고 한다. 엄마가 “나는 잘 모르고, 지들이 알아서 갔다”고 이야기 하면, 주변 사람들은, 겸손해 하지 말고 비결을 알려 달라고 한다는데, 내가 말해주고 싶은 건, 엄마는... 우리 엄마는 진짜 모른다는 것이다. 엄마는 우리에게 입시 동향을 파악해 주기보다, 부족한 살림에, 우리가 부족함 없이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끝까지 밀어 줄테니까 걱정 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밀어주겠다'는 말을 지키기 위해, 매일 밤낮없이 365일 쉬는 날 하루 없이 하루하루 몸으로 보여준 것 뿐. 그렇게 한 푼 두 푼 귀하게 돈 버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 가장 큰 동기부여이고, 우리 가슴을 움직여서 바르게 잘 자라 부모님께 효도하겠다는 동력이 되었다.     


 글을 정리하며 다시 읽어보니 가족자랑 같은데... 네, 자랑 딱 한 번만 할게요. 나는 이런 우리 가족이, 풍족하진 않지만 열심히 바르게 산 우리 가족이 참 자랑스럽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내가 가족들에게 더 잘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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