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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한 일이 뭐에요?

(7) 이야기를 채굴한 광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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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님의 피아니스트 에세이 발굴기를 읽고, "수강생이 다 했네요." "당신은 질문만 했잖아요?" 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사실 Y님의 사례는 스토리마이닝의 핵심 기법들이 자연스럽게 녹아있다. 체계적인 이야기 발굴 과정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당신이 한 일이 뭐죠?"라 묻는 분들에게 오늘은 그 과정을 스토리마이닝의 관점에서 분석해보려 한다.


1. 표면 이야기를 넘어서기


Y님이 처음 가져온 글감은 '한 때 만났던 남자와의 추억 이야기'였다. 하지만 본인도 '딱히 글감이랄 게 없어서' 생각해 본 것이라고 했다. 스토리마이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표면에 드러난 이야기보다 그 아래 숨어 있는 진짜 이야기를 찾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처음에 내놓는 이야기는 '안전한' 이야기다. 상처받지 않을 만한, 거부당하지 않을 만한 주제를 선택한다. Y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연애 이야기는 많은 사람이 쓰는 보편적 소재였지만, 정작 그녀만의 독특한 이야기는 따로 있었다. 그것을 위해서 매 골목마다 내가 던진 질문은 이유가 있었다.


2. 정체성 건드리기


"지금은 혹시 어떤 일 하고 계세요?"

정해진 글감이 없는 상태의 Y 님에게 내가 처음 건넨 질문이다. 내가 가장 식상한 질문으로 시작했다고 했지만, 직업은 그 사람의 정체성이자 풍부한 스토리의 보고다. 사람들이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며, 그가 오랜 시간 노력한 결과와 무의식적으로 축적되어 형성된 가치관이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영역이다.


"피아노과를 나와서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어요."라고 했을 때, 이미 Y님은 자신을 피아니스트라 부르지 않았다. 그녀의 정체성은 '정상적인' 피아니스트의 궤도에서 이탈한 상태를 의미했다. 뭔가 사연이 있다는 촉이 왔다. 일반적으로 피아니스트라고 하면 연주회나 레슨 등 정형화된 활동을 떠올리는데, '프리랜서'라는 애매한 표현이 오히려 이야기의 실마리가 되었다.


3. 라포 형성을 통한 심리적 안정감


라포(Rapport)는 상담심리학에서 내담자와 상담사 간의 신뢰와 친밀감을 뜻한다. 스토리마이닝에서도 이야기하는 사람이 심리적으로 안전하다고 느끼게 하는 것이 핵심이다. Y님이 직업을 말했을 때 나는 잠시 딴 소리로 빠졌다.


"와, 멋있어요. 전 어릴 때 피아노 선생님 오시면 도망 다녔거든요. 옷장에도 숨고, 침대 밑에도 들어가고."

나는 의도적으로 나 자신을 희화화했다. 높은 곳에 있는 피아니스트와 도망 다니던 어린 시절의 나를 대비시켜 Y님이 우위에 서도록 했다.


이것은 자기 노출(Self-disclosure)을 통한 상호성 원리(Reciprocity)의 활용이다. 사회심리학자 로버트 치알디니가 『설득의 심리학』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내가 먼저 개인적인 이야기를 털어놓으면 상대방도 자신의 이야기를 더 솔직하게 들려주게 된다.



4. 기원 스토리 발굴


모든 사람에게는 '기원 스토리(Origin Story)'가 있다. 이는 서사학(Narratology)에서 말하는 출발점 서사로, 왜 그 길을 선택했는지, 어떤 계기로 시작했는지에는 그 사람의 가치관과 동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영화 <기생충>에서도 민혁이가 기우에게 박사장집 과외를 소개하며 소주를 마시는 씬에 기생충 가족의 전사(pre-history)가 촘촘하게 심어져 있다. 어떻게 기택이 수석에 대해 조예가 깊은지, 왜 기정이 오빠인 기우에게 "소리라도 질러봐"라고 했는지, 엄마인 충숙은 왜 아르바이트로 수세미를 뜨고 있는지, 기우는 왜 수능을 네 번 보았는지 모든 실마리가 다 기원 스토리에 있는 것이다.


Y님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고등학교 때 피아노 시작하면 늦지 않아요? 그래도 음대 합격하셨네요."라고 했을 때, Y님은 "어릴 때 집이 여유가 없어서 너무나 피아노 치는 친구들이 부러웠어요"라고 답했었다. 그것은 단지 피아노에 대한 동경이 아닌, 피아노를 칠 수 있는 여유 있는 가정에 대한 동경이었다.


이것은 아버지가 IMF 와중에도 딸의 피아노 레슨비를 중단하지 않은 것과도 연결된다. 그리고 나중에 "피아노를 못 치게 되는 건 죽는 것 같은 고통"이라는 Y님의 트라우마, 갈증, 두려움과도 연장선상에 있다.


5. 감정적 전환점 찾기


진짜 이야기는 감정이 격하게 요동치는 지점에 있다. Y님이 스스로 '무대 공포증' 이야기를 꺼낸 순간, 나는 이것이 핵심 갈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빠를 생각하면 피아니스트로 성공했어야 했는데, 너무 죄송하죠."라는 Y님의 말에는 아버지에 대해 가지고 있는 죄의식과 회한이 드러났다. 어쩌면 Y님이 취업 공부를 해서 외국계 제약회사에 취직했던 것도 아버지에 대한 부채의식의 발현일 수 있다.


하지만 이때 스토리마이너에게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는 과도한 제스처가 아니다. 무조건적 긍정적 관심(Unconditional Positive Regard)이다. 이는 인지 심리학자 칼 로저스가 제시한 개념으로, 판단하지 않고 이해하려는 태도를 의미한다.


내가 "무대 공포증, 그게 그렇게 무서운 건가요?"라고 물은 것은 놀라움이나 궁금증이 아니라 나도 그 상황을 진심으로 Y님의 설명을 통해서라도 이해하고 싶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실제로 아는 것과 다르고, 아는 척하는 것보다 차라리 솔직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 내가 독자와 같은 선상에 서는 것이다.


6. 구체적 디테일


추상적인 표현은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 이것이 창작 이론에서 말하는 'Show, Don't Tell' 원칙이다. 그래서 내가 "피아노만 치다가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기 어렵지 않으셨어요?"라고 물은 것이다. 그래서 피아노 학원 이야기가 나왔고, 아이들과 학부형 이야기가 나왔으며 그때 내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어떤 어려움들이 있으셨을까요"라고 물은 것이다.


왜냐하면 "힘들었다"는 말보다 Y님이 피아노를 가르치다 일곱 살 아이 똥을 닦아주러 화장실로 가거나, 악보 집어던지는 학부모 앞에서 눈물을 참는 구체적 장면이 훨씬 강력하기 때문이다. 이 순간 나의 타이핑이 빨라진 이유도 흙더미 속에 있던 좋은 스토리가 드러나고 있다는 직감 때문이었다.


7. 전환점 포착


모든 좋은 이야기에는 결정적 전환점이 있다. 서사학에서는 이를 페리페테이아(Peripeteia) 또는 플롯 포인트(Plot Point)라고 한다. 소설에 나오는 소위 '그러던 어느 날'이 바로 이 지점이다.


Y님의 경우 교통사고로 인한 손가락 부상이 그 전환점이었다.

"제가 길에 서있다가 자동차가 갑자기 인도를 밀고 들어오는 바람에..."

흥미로운 것은 이 사고가 Y님에게 피아노의 진짜 의미를 깨닫게 해 준 아나그노리시스(Anagnorisis, 인식의 전환)가 되었다는 점이다.


"내가 피아노를 못 치게 되는 건 죽는 것 같은 고통"이라는 깨달음이 그녀의 삶을 다시 한번 바꿔놓은 것이다. 이 지점은 아버지에 대한 죄의식과 부채감을 뛰어넘는, 비교할 수 없는 자신의 본질의 확인 지점이기도 하다.


8. 현재적 의미 부여


"피아노만 칠 수 있으면 괜찮아요"

스토리마이닝의 마지막 단계는 과거의 경험이 현재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이는 내러티브 테라피(Narrative Therapy)에서 말하는 재구성(Re-authoring) 과정과 유사하다.


Y님의 사례에서 보듯이, 처음에 내놓은 연애 이야기와 최종적으로 완성된 <나는 삼류 피아니스트입니다>는 완전히 다른 글이다. Y님도 글을 쓰며 달라졌다. 그녀는 이제 자신을 "삼류 피아니스트"라고 당당히 소개 수 있게 되었다.


Y님의 글은 혼자만의 일기가 아니다. 우리로 하여금 '진짜 피아니스트'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그것은 명성이나 무대가 아니라 피아노 자체에 대한 사랑이고, 그것이 Y님 글이 세상에, 사회에 유익한 이유다.



스토리마이닝의 진짜 힘은 사람들이 스스로도 몰랐던 자신만의 이야기를 발견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읽은 많은 사람들이 진짜 피아니스트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접점을 선사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스토리마이닝이 만들어내는 마법이다.


사람들이 "당신이 하는 일이 뭐요?"라고 하면 나는 "이래 봬도 광부요"라 대답하겠다. 세상이 알아주면 땡큐고 아니면 뭐 할 수 없다.


돌아보면 나름 여러 학문 영역의 이론들도 자연스럽게 녹아있다. 상담심리학, 서사학, 사회심리학, 질적 연구 방법론이 동원된 공 들여 진행한 이 수업에서 처음 글을 쓰러 온 200분 이상의 분들이 출간을 마쳤다.


열심히 수업한 시간이 아까워 논문 하나라도 남겨볼까 생각 중인데... 누가 읽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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