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직업의 세계를 발굴하는 방법
수업에서 만난 J님은 앳된 얼굴의 20대의 병원 근무자였다.
"보건의료정보관리사입니다."
직업이 무려 9글자였다. J님은 우리의 반응을 예측한 듯 웃고 있었다. 나도 처음 듣는 직업명이어서 궁금했다.
"보건의료정보관리사면 구체적으로 병원에서 어떤 업무를 하시는 거예요?"
"간단히 말하면 병원에서 환자 기록을 관리하는 일이에요."
"환자 기록이요? 의사 선생님이나 간호사분들이 하는 거 아닌가요?"
"의사 선생님들은 진료하시고, 간호사분들은 환자 케어를 하시죠. 저희는 그분들이 작성한 의료 기록들을 정리하고 관리해요. 환자 차트, 검사 결과, 수술 기록, 퇴원 요약서 같은 것들을요."
"아, 원무과 쪽이시군요."
"단순 사무직은 아니에요. 의학 용어도 알아야 하고, 코드도 알아야 하고, 의료법이나 개인정보보호법 같은 법규도 숙지해야 해요. 특히 환자 정보는 굉장히 민감하잖아요."
"의료정보관리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보건의료정보관리학과를 나오거나, 아니면 다른 전공을 하고 보건의료정보관리사 자격증을 따면 돼요. 의학 용어, 해부학, 병리학 같은 기초 의학 지식도 필요하고, 통계나 전산 프로그램도 다룰 줄 알아야 해요."
상당한 전문성을 요하는 전문직이었다.
J님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보건의료정보관리사라는 직업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했다. 그러니까 이 긴 이름의 직업을 사람들이 잘 몰라주고, 길어서 잘 기억하지도 못하고, 잘 부르지도 못하고, 홀대하고, 차별하니까 자기 직업이 하는 일을 나름 세상에 알리고 싶다고 했다. 나는 바로 회가 동했다. 직업 이야기에 내가 바로 클릭되는 이유는 우리가 평생 누릴 수 있는 직업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나는 은행, 법률사무소에서 아르바이트도 했고 PR회사, 방송국, 갤러리, 대학교에서 일을 해보았지만 병원, 공항, 레스토랑, 공사현장, 바다, 관공서에서는 일해본 적이 없다. 당연히 그쪽 직업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이 크다. 하는 업무도 그렇지만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말이다.
나는 바로 J님의 초안을 살펴보았다. 주로 직업적으로 겪은 힘든 이야기들이었고 이 직업에 대해서 사람들이 잘 인식해 주기를 바라는 주장과 생각의 글이었다. 여기서 내가 할 일은 주장에 부드러운 어댑터를 끼우는 일이었다. 즉, 사람들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게 하는 구조화 작업 말이다.
내가 글을 쓰려는 분들에게 하는 이야기가 있다. 너무 팩폭이어서 미안한 이야기지만 세상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 슬프지만 사실이다. 세상은 그저 내가 줄 수 있는 것들에만 관심이 있다. 그것은 재미, 공감, 정보, 편견의 변화, 행동의 동인이다. 독자는 이야기가 재미있을 때 비로소 귀를 기울인다. 그러니 글에서는 생각과 주장을 재미있는 에피소드 중심으로 가공해야 하는 것이다.
독자들이, 세상이 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말에 실망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당연하다. 독자들은 모두 생업과 일로 지쳐있고, 재미있는 이야기나 예능을 보며 쉬고 싶다. 그러니 글도 재미 위에 정보가 살며시 업혀 들어가야 한다.
초안을 두고 나는 J님에게 말했다.
"아침에 몇 시에 일어나세요? 밤에는 몇 시에 잠드시고요?"
"다섯 시에 일어나서 12시에 자요."
"그럼 거의 19시간을 움직이시는 건데, 대단하세요."
"그게... 피곤하긴 한데요. 하고 싶은 일이 많아서요. 퇴근하고 영어 공부랑 운동이랑 글쓰기를 해요."
소위 갓생 20대였다. 병원 일도 힘들긴 하지만 해보고 싶은 일들이 많다고 했다. 그러니 내 글쓰기 수업에 등록해서 밤 10시까지 수업을 듣고 있는 것이다.
나는 J님의 시간이 헛되지 않도록 좋은 에세이를 출간할 수 있게 돕고 싶었다. 제일 좋은 방법은 그녀가 살아가는 하루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했다. 리얼 다큐 형식의 글로 말이다.
그래서 J님에게 제안했다.
"고은님의 하루 24시간을 시간대별로 써보면 어떨까요?"
"매일 똑같은 일상인데 재미가 있을까요?"
"그건 독자가 판단할 거예요. 일단 아침부터 한번 해보죠. 아침에 일어나서 뭘 하세요?"
J님의 하루는 꽤 촘촘했다. 새벽 6시 반에 버스 탑승, 7시 반 병원 도착
"병원에 도착하면 바로 업무를 시작하세요?"
"일단 마음의 준비를 해요. 오늘은 어떤 민원이 올까 생각하면서."
여러 업무 중에서 가장 두려운 것이 예측 불가한 민원인 모양이었다.
"순서대로 하시는 일을 이야기해 주시겠어요?"
"아침에 출근하면 8시부터 우선 의사 기록을 확인해요. 누락이나 수정 사항이 있으면 연락을 하고요.
"예를 들면 어떤 대화가 오가나요?"
병원은 우리가 잘 모르는 세계이기 때문이 글에 들어가는 대화에 현장 전문용어의 묘미를 살려야 한다.
"제가 전화를 받은 의사라 생각하시고 그대로 이야기를 해보시겠어요?"
"음... 선생님, 환자분이 양막의 조기파열로 오셔서 응급 제왕절개술을 시행하신 거 같은데 맞나요? 그렇다면, 제왕절개술을 시행한 원인인 양막의 조기파열을 주진단으로 주시고 응급제왕절개술이랑 분만의 결과 코드순으로 부여해 주시면 됩니다.”
J님이 엄청나게 멋있어 보였다. 수업을 같이 듣는 동기 수강생들도 우와 감탄사를 날렸다. J님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하나 더 해요?"
모두 박수를 치며 대 환영이었다.
"아, 선생님, 이 환자분은 무릎관절증으로 무릎관절 치환술을 한 다음 합병증으로 감염 소견이 있어 재수술을 하기 위해 오셨네요. 그럼 합병증 코드로 진단명을 부여하고 무릎관절치환술 이후 재수술하기 위해 온 거니까... 무릎관절교정술로 수술코드를 부여하겠습니다."
J님의 문장은 두 배 더 길어졌다. 우리의 박수소리도 두 배가 되었다.
"그 다음 이어지는 업무도 이야기 해주세요."
"입원 환자 차트 정리부터 해요. 밤사이 응급실에서 올라온 환자들 기록도 정리하고요. 그다음에는 퇴원 환자들 수납 업무, 보험 청구 업무도 처리해요."
"보험 청구도 직접 하세요?"
"네, 환자가 받은 치료에 대해 건강보험공단에 비용을 청구하는 일도 저희가 해요. 진료비 계산도 하고요. 의료진이 어떤 치료를 했는지 정확히 파악해서 보험 적용이 되는 부분, 안 되는 부분을 구분해야 해요."
설명을 들어보니 보건의료정보관리사는 일당백, 병원에서 없어서는 안 될 부서였다.
그래서 가장 그들을 힘들게 하는 것이 일인지 다른 요인인지 물어보았다.
"일하면서 가장 힘든 점은 뭐예요?"
"실수하면 안 된다는 압박감이 가장 커요. 제가 잘못 입력하거나 빠뜨린 게 있으면 환자 치료에 영향을 줄 수 있거든요. 그리고... 솔직히 민원인 분들의 응대가 힘들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이 있으셨어요?"
"의사도 아니고 간호사도 아니니까 뭐 하는 사람인지 모르겠다는 시선이 있어요. 수술에 불만인 환자 가족에게 멱살도 잡히고요. 심지어 크록스도 못 신어요. 의료진 전용이라고 해서요."
나는 바로 크록스 이야기에 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