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양품점집 딸은 무엇으로 사는가

(10) 소녀는 그렇게 패션을 배웠다

by note by



저녁 8시, 아이를 막 재우고 온 H님은 흰 티셔츠에 질끈 머리를 묶은 모습이었다. 화장기 하나 없었지만 갸름한 얼굴에 세련미와 기품이 있었다. 그녀는 돌아가신 엄마에 대한 글을 쓰고 싶어 수업을 신청했다고 했다.

"몇 년 되었어요. 더 늦기 전에 엄마 이야기를 기록하고 싶어서--."

출간 수업을 신청하는 분들 중에 간혹 이렇게 아버지, 어머니의 기록을 글로 남기려 오는 분들이 있었다. 모두 '더 늦기 전에'라는 말을 했었다. 기억의 유한함, 당시만 해도 몇 장에 불과한 사진 만으로 충분치 않는 이야기를 꼭 써야 한다는 책임감 같은 것이었으리라.


"엄마 하면 어떤 모습이 제일 기억에 남으세요?"

희미한 기억을 글로 쓰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스토리마이닝 기법은 보이고 들리게 말해달라고 하는 것이다. 영화처럼 눈앞에 그려지게 말하면 그대로 글이 된다. 이럴 때 질문은 대답의 한 부분에 대한 구체적인 단어나 문장을 물고 꼬리에 꼬리를 물어 이어나가는 것이다.


"진짜 멋쟁이셨어요. 엄마가 아빠와 만났을 때 서른 하나 노처녀였는데 10년 동안 직장생활 내내 차곡차곡 저금한 돈으로 아빠랑 결혼을 했대요. 그리고 저희가 줄줄이 태어났고요. 밥 먹다가 TV에 윤복희 나오면 항상 그랬어요. '엄마도 미스 때 미니스커트로 명동을 주름잡았었어, 윤복희는 저리 가라였지~'라고요."

"윤복희도 저리 갈 정도면... 엄청난 패셔니스타셨네요."

"분홍색 미니 스커트에 펄이 섞인 흰 하이힐을 신고 다녔대요."

"지금 같으면 세계적인 모델이든 디자이너가 되셨겠어요."


"그래서인지 엄마는 제가 태어난 지 얼마 있다가 가게를 시작하셨어요. 말은 생계에 보태려고 한 것이었다는데 제 생각엔 엄마가 집에만 있기 싫어서 일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H님이 태어난 게 어머니 경력단절을 해결했네요. 혹시 패션 쪽 일을 하셨을까요?"

"아빠 가게 한편에 양품점을 열어서 옷을 팔았어요. 아주 물 만난 물고기 마냥 대단했어요"

"양품점, 오랜만에 듣는 단어네요. 요즘은 보기 힘들지만 그땐 동네마다 하나씩 있었죠. 지금으로 말하면 편집샵 같은 곳이잖아요. 참새 방앗간도 되고요. 그런데 아버지 가게 한쪽이면 잘 안 보일 텐데..."



"처음엔 작은 가게여서 사람들이 잘 몰랐대요. 그래서 엄마가 소위 홍보한다고 가게에서 제일 비싼 옷을 입고 나갔대요. 동네 여자들이 엄마한테 '그 옷 어디서 샀냐'라고 물으면 가게로 죄다 데려 왔대요. 입고 나갔다가 다림질해서는 새것처럼 다시 걸어놓곤 했고요."

"피팅모델을 하신 거네요. 맵시가 좋으셨나 봐요."

"저희 셋을 낳고도 처녀 때 몸무게 그대로였어요. 변변치 않은 살림에 집 반찬으로 도시락을 싸서 끼니를 때우셨지만 한 번도 저희 끼니를 대충 차리신 적이 없었어요. 양념 한 톨까지 싹싹 비우는 아빠를 미련한 짐승 보듯 쏘아붙이면서도 매일 한 상을 차려주셨죠"


"당시 가정 주부로 아이 키우고 살림한 분들 중에 지금 생각하면 대단한 사업가들이 많았을 거예요."

"엄마가 성격이 무척 활달해서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걸 좋아했어요. 당시 믹스커피가 나왔는데, 엄마는 그거 마시면서 단골손님들이랑 수다 떠는 시간이 유일한 힐링이었대요. 그래서 그런지 일요일 빼고는 항상 가게에 계셨어요. 우리는 매일 가게 가서 동네 아줌마들이 싸 온 수박이랑 복숭아 먹으면서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때 어떻게 옷을 입어야 하는지, 어떻게 가꾸어야 하는지, 파마는 어디가 잘하는지 다 배운 것 같아요."

작은 양품점집 딸은 그렇게 아름다운 아가씨가 되는 선행학습을 동네 참새 방앗간에서 하고 있었다.


"그렇게 활동적이셨던 분이 어떻게...'

"4년 전이었어요. 혈액암으로 진단받은 지 일 년 만에..."

"..."

"가게를 얼마나 깨끗하게 정리해 두었는지... 일주일 후 갈 걸 알고 있었나 봐요."

H님의 목소리가 떨리더니 순간 화상 수업 H님의 카메라가 꺼졌다. 4년 전의 기억에서 H님은 자유롭지 않았다. 우리 모두 그렇게 떠나보낸 누군가가 떠올랐을까. 하나 둘 카메라가 꺼졌다.




keyword
이전 09화우리는 왜 크록스 못 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