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보이지 않는 직장 내 계급
"크록스요? 크록스를 못 신어요?"
나는 J님을 통해 병원 안의 크록스 계급에 대해 알게 되었다. 크록스는 장 시간 근무해야 하는 병원 근로자에게 꿈의 신발이었다. 우선 가장 고강도 노동 의사가 신고, 간호사가 신고, 방사선사가 신고... 사무직에게 크록스 허가는 쉽지 않다고 했다.
"방사선과도 1년 투쟁해서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보건의료정보관리사의 어정쩡한 신분은 크록스를 용납하지 않았다. 크록스가 정의하는 병원 내 신분 계급, 미묘한 위계 구조 속에서 분리되는 경험. 크록스라는 작은 신발 하나가 의료진 내 위계질서를 대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희는 매일 구두 신고 다녀요. 하루 종일 민원도 처리하는 부서라."
"환자들이 무리한 요구를 할 때도 있어요?"
"당연히요! 퇴원할 때 수납 창구에서 실랑이도 생기고, 보험 서류 떼어 달라고 고함치기도 하고, 진료 기록 발급 내용 바꿔 달라고 하는 분들도 응대해야 해요. 가끔 개인정보 때문에 곤란한 상황도 있어요."
"개인정보요?"
"예를 들어 환자분이 돌아가셨는데 가족이 와서 의료 기록을 달라고 하시는 경우요. 법적으로는 환자 본인 동의 없이는 안 되거든요. 가족분들은 이해 못 하시죠."
"아, 그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요?"
"법 규정을 설명드리고, 가능한 범위 내에서 도움드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요. 상속이나 보험 청구용으로 필요한 서류는 별도 절차를 통해 발급해 드릴 수 있거든요.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라 막 소리치시면 힘들어요. "
'민원 처리'라는 표현을 썼지만, 실제로는 감정노동을 하고 있었다. 환자와 가족의 불안을 달래고, 복잡한 의료 시스템을 설명하고, 때로는 화풀이 대상이 되어주는 일까지. J님의 일은 환자에게도 의료진에게도 절대적으로 중요한 업무였다.
하지만 그들은 환자들 목숨을 구하는 의료진도 아니고, 엑스레이에 온종일 노출되는 방사선사도 아니었다. 옷은 의료진 옷을 입고 있어 더 어정쩡했다. 수술 결과에 불만족한 환자 가족들에게 수시로 멱살을 잡혔고, 오픈 공간에서 근무해야 해서 피할 곳도 없어 꼼짝없이 을이었다.
긴 시간 앉아 서류를 떼고 민원을 처리하는 그들의 발은 퉁퉁 부어오르지만 사무직 구두를 신어야 했다. J님 같은 근무자의 고통은 그들의 업무가 선명하게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경계역할(Boundary Role)이라는 이유에서 오는 것이었다.
"퇴근할 때 기분이 어때요?"
"후련해요. 오늘도 실수 없이 잘 마쳤다는 안도감이요."
"스트레스 관리도 하셔야 할 것 같은데..."
"병원일과 정 반대의 일을 해요. 운동, 책, 영화, 영어, 맥주도요. 하지만 저는 이 일이 좋아요. 제가 없으면 병원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아니까."
낙천적인 20대 청춘이었다.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의 일에 대한 의미와 가치를 발견해 가는 단단한 자아, 자기 효능감이 반짝였다.
"아무것도 하기 싫으면 뭐 하세요?"
"그래도 영어 공부는 해요. TV 보면서 좀 쉬고요. 근데 의료 드라마 나오면 짜증 나요."
"왜요?"
"의사, 간호사만 나오잖아요. 저희 같은 사람은 없어요. 마치 병원에 의사, 간호사만 있는 것처럼."
처음에 J님이 쓰려던 직업 소개글은 정보 전달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24시간 시간대별 서사를 통해 발굴된 이야기는 풍부한 사회적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일상 서사의 힘을 통해 우리는 의료 시스템의 숨겨진 구조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크록스를 부러워하고, 점심시간을 쪼개 영어 공부를 하고, 개인 서류를 떼어 달라는 민원인의 고성을 참으면서 끝까지 버티는 가녀린 20대 여성의 직업 정신, 그 속에서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해내며 새벽 5시 버스를 타는 사람의 존재감 말이다.
사회는 이런 구성원의 힘으로 움직인다. 그들의 이야기는 글이 아니고서는 세상과 만나기 어렵다. 이것이 바로 스토리마이닝의 힘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작지만 단단한 조약돌 같은 삶에 대한 깊은 이해와 공감을 만들어내는 것.
<3년 차 보건의료정보관리사입니다>를 읽은 독자들은 병원 창구에서 만나는 보건의료정보관리사를 이전과는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나도 그렇다. 특히 그들이 신고 있는 신발에 눈이 간다.
보건의료정보관리사에게 크록스를 허용하라! 허용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