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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기타를 배우고 싶다 하셨어

(12) 유한한 인생이 남기고 싶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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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후한 목소리와 함께 수업 화면에 중년의 부산 사나이 T님... 화면 뒤편으로 벽에 걸린 기타 사진이 보였다.


"아이들한테 목소리를 남기고 싶어서...오디오북 출간을 신청했습니다. 제가 기타 치고 노래 넣고 제가 평소에 못했던 이야기도 제 목소리로 넣고 싶어서요"


출간 수업을 하다 보면 간혹 이런 분들을 만난다. 자신의 이야기를 가족을 위한 기록으로 남기려는 사람들. 대부분 '나중에 내가 없어도'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일종의 디지털 유산을 남기고 싶으신거죠?"

"아들이 둘인데, 사춘기거든요. 저도 그렇고 아이들도 그렇고 별로 대화도 안 해요... 나중에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려주고 싶어서."


T님의 목소리에 묵직한 부성애가 묻어났다. 물론 여기서 멈출 수 없었다. 스토리마이닝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함정은 '가족만을 위한 이야기로 그치는 것이다. 아무리 감동적이어도 독자와의 접점이 없으면 공감받기 어렵다.


"구체적으로 어떤 이야기를 담고 싶으세요?"

"제가 기타를 치거든요. 그래서 제가 기타 치면서 제 목소리로 글을 읽는 그런 책을 생각해 보긴 했는데... 아직 기타 실력이 별로라 잘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와, 멋있어요. 선생님 기타는 언제부터 치셨어요?"

"대학생 때부터니까... 한 20년 넘었네요. 그것도 했다 안 했다 한 거라..."


나는 기타를 전혀 모른다. 하지만 스토리마이닝에서는 모르는 것이 오히려 장점이 될 수 있다. 독자의 입장에서 질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타가 칠 수록 묘합니다. 아직도 어려운 코드가 있어요."

"아직 어려운 코드요?"

"F코드라고 있거든요. 기타 배우는 사람들한테는 마의 구간이에요."

"F코드가 왜 어려운 건가요?"

"파, 라, 도, 미... 간단한 구성음이라 만만해 보이거든요. 그런데 막상 짚어보면 이상한 소리가 나요. 손가락에 쥐도 나고, 손가락 끝도 갈라지고..."


T님이 설명하는 F코드의 특징을 듣는 순간, 나는 이것이 단순한 음악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럼 F코드를 연습하는 과정이 삶과 비슷한 부분이 있을까요?"

"어? 그러게요... 생각해 보니까 비슷한 게 많네요."

이 지점이 T님 스토리마이닝의 핵심이었다. 구체적인 소재에서 보편적 은유를 발견하는 것.




"선생님 인생과 기타와 혹시 비슷하다고 생각하세요?"

"네. 딱 그런 구간들이 있습니다. 2014년에 첫 사업을 시작할 때가 딱 그랬어요. F코드처럼 만만해 보였거든요. 그런데..."

T님의 목소리가 잠시 멈췄다. 아마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을 것이다.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어요. 준비 부족이었죠. F코드 배울 때처럼 손가락에 쥐 나는 기분이었어요."

여기서 나는 확신했다. F코드는 처음엔 쉽게 보였다가 정작 해보면 만만치 않은 순간들과 비슷하다는 것을. 단순한 음악 기법이 아니라, S님 삶의 중요한 은유가 될 수 있다는 것 말이다.


"또 다른 F코드 같았던 순간이 있을까요?"

"20대 중반에 군 입대하면서 첫사랑이 끝났을 때... 그것도 F코드 같았어요. 기억하기도 싫고 손끝이 갈라지고 피나고 쥐나고."

T님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하지만 이런 순간이야말로 진짜 이야기가 나오는 때다.

"첫사랑 이야기에 회상 모드로 진입하셨나 봐요."

"아, 선생님, 와이프한테 혼나요."

다섯 명 모여 앉은 수강생들이 모두 '아무것도 못 들은 귀"라고 하며 귀를 막았다.

"그때 친구 놈들 한데 배운 대로 했는데 최악의 결과가 나왔거든요. 그때도 F코드처럼 뭔가 잘못된 소리만 났어요."

"친구들이 나빴네요."

첫사랑이 뭔지 아는 사람들이 모여 앉으니 첫사랑에서 T 님 글의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항상 악역을 해야 하는 내가 다른 질문으로 넘어갔다.

"직장생활은 어떠셨어요?"

"15년 다녔는데... 그것도 F코드 연습 같았어요. 고약하고 배려 없고 잔인한 코드를 마스터하지 않고는 더 많은 곡을 연주할 수 없잖아요. 직장도 마찬가지였어요. 그 다음에 부도 나고, 가족들도 고생하고..."

T님은 자신의 인생과 은유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F코드라는 음악적 소재로 이것저것 연결하니 F코드를 주제로 구체적으로 아버지의 삶을 글로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글의 마무리를 어떻게 할 까 미리 생각해두려고 질문했다.

"그럼 마침내 F코드를 마스터한 순간이 있었나요?"

"네! 작년 겨울 금요일 저녁이었어요. 자우림의 '스물다섯스물하나'를 처음으로 제대로 연주할 수 있었거든요."

T님의 목소리가 갑자기 밝아졌다. 그 순간의 벅찬 감동이 여전히 생생한 듯했다.

"갑자기, 딱! 되는 거예요. 아이들도 박수를 치고. 그때 깨달았죠. 이 모든 과정이 아이들에게도 전해질 수 있겠다고."


바로 여기서 T님의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단순한 개인사가 아닌, 인내와 극복의 서사, 모든 아버지들이 겪었고, 공감할 수 있고, 아이들에게, 사회에 공유할 수 있는 성장 서사...


"이 이야기를 아이들만 듣게 하시면 될 텐데, 왜 오디오북으로 만들고 싶으신 거예요?"

S님이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는 중요한 이야기지만... 생각해 보니 기타 치는 아빠들은 다 비슷할 거 같아요. 다 F코드 같은 구간에서 좌절하고, 다 마스터하는 기쁨을 느끼며 살아오니까 말입니다."

개인의 경험이 보편적 공감대로 확장될 수 있다는 것을 T님도 생각하게 되었다.


"그럼 제목을 '기타와 두 아들'로 하면 어떨까요?"

"좋네요. 기타를 통해 아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 다른 아버지들도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게 해서 부산 사나이 T님의 스토리마이닝이 끝났다.


한 남자의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글, 모든 아버지들의 이야기가 되는 글, 기타라는 상징물로 무뚝뚝한 아버지를 이야기하는 방법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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