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政治)에 대하여 – 테러리스트의 탄생

시나리오

by 백수웅변호사



1. EXT. 여의도 빌딩 옥상 - DAY


국회의사당의 돔 지붕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와 마주한 빌딩 옥상. 난간 끝에 한 남자가 위태롭게 서 있다. 말끔한 정장 차림의 정치(40대 초반). 가슴에 달린 국회의원 배지가 석양에 번쩍인다.
그는 두 팔을 벌려 바람을 맞는다. 묘하게 평온하고, 행복해 보이기까지 하는 표정.


정치 (V.O.)
내 삶의 마지막 정치를 시작하려 한다.


강한 햇빛에 정치가 눈을 찡그린다.


정치 (V.O.)
사람들은 내가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했다. 틀렸다. 다만, 아픈 게 무엇인지 너무 늦게 알았을 뿐이다. 난 나라와 국민을 위해 일하는 정치인이다.


정치는 미련 없이 눈을 감는다.


TITLE: 정치(政治)에 대하여 – 테러리스트의 탄생


2. INT. 분만실 - NIGHT (1981)


수진이 고통 속에서 아이를 낳고 있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한쪽에서 남편 지원이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 아이의 머리가 보이지만,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정치 (V.O.)
삶에 대한 세상의 기록은 분만실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기억이 그 시작이라고 말한다면, 내 삶은 그 이전부터였을지도 모른다.


수진의 배가 클로즈업되며 화면이 어두워진다.


3. INT. 수진의 자궁 속 (C.G) - (시간 역순)


자궁 안에서 유영하는 태아의 모습.
화면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수정 과정, 그리고 수억 마리의 정자들이 난자를 향해 돌진하는 모습.


4. INT. 지원의 고시원 - NIGHT (1980)


5평 남짓한 고시원. 법률 서적들이 어지럽게 쌓여있다.
이불 속, 지원과 수진이 관계를 맺고 있다.


지원
수진아, 우리 한 번만 더 하자. 내가 잘할 수 있어.


수진
(지원을 밀치며)
저리 안 꺼져. 병신새끼.


정치 (V.O.)
엄마 말에 따르면 아빠는 '병신'이었다. 대학 시절 운동권이란 이야기를 자랑하고 다녔다고 했다. 하지만 사실 아빠는 무늬만 운동권이었을지도 모른다.


5. EXT. 지원의 고향 집 앞 - DAY (1980, FLASHBACK)


화염병 연기가 자욱한 거리. 시위대가 "독재 타도"를 외치며 지나간다.
자전거를 탄 집배원이 지원의 집 문 안으로 우편 봉투를 던지고 사라진다.

잠시 후, 반바지에 슬리퍼를 신은 지원(22)이 나온다. 우편 봉투를 집어든다.
봉투 안의 편지를 확인한 지원의 얼굴이 굳는다. 손에서 편지가 떨어진다.
클로즈업 - 편지. "현역병 입영 통지서"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정치 (V.O.)
아빠가 본격적으로 운동권으로 전향한 계기는 바로 저 편지 한 통이었다. 아빠에게 있어 독재보다 무서운 건 군대였다.


6. INT. 대학교 동아리방 - DAY


벽에 걸린 대자보. 그 앞에 선배들이 한심한 눈으로 서 있다.
지원이 그들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


7. EXT. 대학교 앞 시위 현장 - DAY


군인들과 시위대가 대치 중이다. 기자들이 연신 사진을 찍는다.
선배가 지원에게 화염병을 건넨다.


선배
여기 진짜 뜨거운 거 있으니까. 저기로 하나 던져봐. 여긴 역사야. 너도 이름 하나 남겨야지.


겁에 질린 지원, 온몸에 땀이 흐른다.
지원은 화염병을 높이 들고 군인들을 향해 던지려 한다.
하지만 손에서 미끄러진 화염병이 그의 바로 앞에 떨어진다.
'펑!'
화염병 연기가 지원을 집어삼킨다. 지원, 연기를 그대로 들이마시고 괴로운 듯 바닥을 구른다.
그 순간,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가 일제히 터진다.
화면 가득 채우는 신문 사진 - 화염병 연기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지원의 모습.


정치 (V.O.)
사실보다 중요한 건 강렬한 이미지였다. 사진 속 아버지는 이미 '민주화 투사'였다.


8. INT. 지원의 고시원 - NIGHT (현재)


수진과 관계를 갖던 지원. 이불을 박차고 일어난다.


지원
두고 봐. 난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정치인이 될 거야. 나라와 국민을 위해서!


수진
(지원의 말을 끊으며)
...웃기고 자빠졌네. 네 앞가림이나 잘하셔.


지원은 수진을 거칠게 밀어붙인다. 수진이 저항한다.


정치 (V.O.)
내 기억의 시작은 지금, 이 순간부터다.


9. INT. 수진의 자궁 속 (C.G)


수억 마리의 정자들이 난자를 향해 돌진한다.
그때, 검은 입자(화염병 연기)가 나타나 대부분의 정자들을 죽인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정자(정치)만이 파랗게 빛나며, 아무런 경쟁 없이 행복한 표정으로 유유히 헤엄친다.
그렇게 정자는 난자와 결합한다.


정치 (V.O.)
화염병 연기는 내 친구들에게 치명적이었다. 난 혼자서 깊은 터널 속을 달렸다. 아무런 경쟁 없이.


10. INT. 분만실 - NIGHT (1981)


의사가 수진의 자궁에서 아기(정치)를 꺼낸다. 아기는 울지 않는다.
당황한 의사가 아기의 엉덩이를 때린다. 그래도 아기는 울지 않고 무표정하다.


의사
이상하네... 아이가 울지를 않아요.


정치 (V.O.)
아프지 않다.


아기(정치)의 시선이 분만실 스탠드 거울로 향한다.
거울 속에는 고통스러워하는 수진, 불안해하는 지원, 다급한 의료진의 모습이 비친다.


아기(정치), 거울 속 수진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빤히 본다.
그리고 그 표정을 그대로 따라 하듯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으아아앙-!"
그제야 아기의 울음소리가 분만실에 울려 퍼진다.


11. INT. 산후조리원 면회실 - DAY


유리창 너머로 정치를 보며 할아버지가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정치는 반응이 없다. 할아버지가 주머니에서 현금을 꺼내 흔든다.


할아버지
보라니까. 저 녀석 반응하는 것 봐. 돈을 엄청 밝힌다니까.


할아버지가 수진에게 아기 이름을 묻는다.


할아버지
벌써부터 이리저리 눈치 보는 거 보니까 딱 지 아비처럼 정치할 놈이야. 아가 이름, 정치 어떠냐?


정치 (V.O.)
그렇게 난 '정치'가 되었다.


12. MONTAGE


넓은 방 안, 혼자 TV를 보는 정치(5). TV 속 인물들의 표정을 똑같이 따라 한다.
분주하게 집을 나서는 지원. 그를 외면하고 누워있는 수진.
혼자 밥을 먹는 정치.
창가에 앉아 눈물 흘리는 수진. 열이 나는 듯 아파 보이는 정치가 그 모습을 쳐다본다. 수진은 돌아보지 않는다.


정치 (V.O.)
내 삶은 평범했다. 하지만 난 특별했다.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13. INT. 정치의 집 - DAY


거울 앞에 선 정치(5). 손에는 'How do you feel'이라는 그림책이 들려 있다.
책 속 원숭이의 표정(슬픔, 기쁨, 놀람, 분노)을 거울을 보며 기계적으로 따라 한다.
뒤에서 수진이 그 모습을 지켜본다.
정치, 뒤돌아 수진을 발견하고는 책에서 본 '웃는 표정'을 지으며 "하하하" 소리를 낸다.
수진,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치며 도망간다.


정치 (V.O.)
난 내 감정은 물론 상대방의 마음도 이해하지 못했다. 스스로 배워야만 했다.


14. INT. 점집 - NIGHT


화려한 옷차림의 무당이 정치(5)를 본다. 수진이 옆에 앉아 있다.


무당
허. 요놈, 신기한 놈일세. 눈에서 내 모습이 보여. 꼭 거울 같다고. 아주 투명한... 영혼이 없어서 그려.


무당이 웃자, 정치도 따라 웃는다.
잠시 후, 굿판이 벌어진다. 무당이 춤을 추며 정치의 주변을 돈다.
정치, 불상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다.
불상 속 정치의 모습이 악마로 변한다. 정치는 놀라지 않는다.
무당, 춤을 멈추고 불상에 비친 악마의 모습을 본다.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치며 달아난다.


무당
저리 가! 저리 사라지라고!


수진은 입을 가린 채 정치를 쳐다본다.


정치 (V.O.)
난 악마를 처음 만났다. 나를 바라보는 엄마의 표정에서... 어쩌면 내가 악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15. INT. 지원의 장례식장 - NIGHT


텅 빈 장례식장. 상주 자리에 중학생 정치(15)가 무덤덤하게 앉아 있다.
한 조문객이 정치의 손을 잡는다.


손님 1
너희 아빠는 진짜 훌륭한 분이셨어. 민주화를 위해 정말 많은 노력을 하셨지.


정치 (V.O.)
아버지는 민주화를 위해서 일했다고 한다. 민주화가 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16. EXT. 지하철역 앞 - DAY (FLASHBACK)


'시의원 후보' 어깨띠를 맨 지원이 사람들에게 손을 흔든다.


정치 (V.O.)
대학 시절 화염병 사진 한 장은 아버지를 민주화 투사로, 그리고 시의원으로 만들었다.


17. INT. 중국집 - DAY (FLASHBACK)


지원이 주변 사람들과 인사하느라 짜장면이 불어 터지고 있다. 정치는 혼자 짜장면을 먹는다.


18. INT. 정치의 집 - NIGHT (FLASHBACK)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지원. 불 꺼진 집에서 혼자 소주를 병째 마신다.


19. INT. 지원의 사무실 - DAY (FLASHBACK)


농민 단체들이 지원에게 항의하며 서류를 집어 던진다.


20. INT. 정치의 집 - NIGHT (FLASHBACK)


초췌한 모습으로 들어오는 지원. 수진은 그를 외면한다.


21. INT. 지원의 방 - NIGHT (FLASHBACK)


지원이 정치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린다.


지원
정치야... 넌 아버지같이 살지 마라. 난 이기적인 놈이야. 정치를 하면서 악마로 변해갔어. 나 같은 악마는 죽어야 해. 벌을 받아야 해.


방 안, 스탠드 조명에 비친 지원의 그림자. 그 머리 위로 악마의 뿔이 보인다.


지원
정치 같은 거는 절대 하지 마라.


정치 (V.O.)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22. INT. 지원의 장례식장 - NIGHT


수진과 할머니가 유산 문제로 다툰다.


할머니
너랑 지원이랑 이혼 소송 중인 거 알고 있다. 그냥 깔끔하게 나누고 갈라서자.


수진
(목소리를 높이며)
어머니, 정치는요! 정치는 생각 안 하세요?


다툼에 관심 없다는 듯 육개장을 먹던 정치, 큰 소리로 트림을 한다.
수진과 할머니가 한심하다는 듯 정치를 쳐다본다.


23. INT. 할아버지 집 거실 - NIGHT


방 안에서 가족들의 싸움 소리가 격해진다.
소파에 앉아있던 정치(15), 스탠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다.


지원 (V.O.)
나 같은 악마는 죽어야 해.


정치 (V.O.)
그래. 악마는 사라져야 한다.


정치, 라이터를 켜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인다. 거울 속 악마의 몸에도 불이 붙는다.
정치의 몸에 붙은 불이 거실로 번진다.
방에서 뛰쳐나온 가족들이 경악한다.


수진
정치야!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정치
엄마. 악마는 사라져야 해.


잠시 후, 집은 화염과 연기로 가득 찬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가스에 질식해 쓰러진다. 수진이 바닥을 기며 괴로워한다.
멀리서 소방차 사이렌 소리가 들린다.


수진
(작은 목소리로)
정치야... 살려줘.


정치, 수진을 안고 불길 속에서 나온다.
밖에는 소방관들과 구경 나온 시민들이 있다. 일부가 정치에게 박수를 보낸다.
정치, 수진을 내려놓고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소방관
학생, 화상을 심하게 입었는데 괜찮아?


정치
아프지 않아요. 괜찮습니다.


정치는 그대로 의식을 잃고 쓰러진다.


정치 (V.O.)
아버지는 악마는 사라져야 한다고 했다. 난 악마를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할아버지, 할머니는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의식불명에 빠졌다. 악마는 사라지지 않았다.


24. MONTAGE


신문 기사 사진: '어머니의 생명을 구한 중학생'이라는 헤드라인과 함께 실린 정치의 모습.
'청소년 의인상'을 받는 정치.
대기업 장학금을 전달받는 정치. 박수 소리가 울려 퍼진다.


25. INT. 고등학교 교실 - DAY


고등학생이 된 정치(19)가 교실에서 잠을 자고 있다.
같은 반 친구 혜정이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본다.
혜정이 뭉친 휴지를 던지지만, 정치는 깨지 않는다. 혜정이 지우개를 던진다.
그제야 잠에서 깬 정치, 혜정과 눈이 마주친다. 혜정이 환하게 웃는다.


정치 (V.O.)
운 좋게 명문 고등학교에 특례 입학했다. 명문대 진학만을 목표로 하는 이곳은 나와 어울리지 않았다.


26. EXT. 학교 앞 - LATE AFTERNOON


하굣길. 학원 버스들이 즐비하다.
집으로 향하는 정치. 누군가 던진 작은 돌에 머리를 맞는다.
뒤돌아보니 혜정이다. 미소 짓고 있다.


27. EXT. 학교 옆 골목 - LATE AFTERNOON


혜정이 담배에 불을 붙여 한 모금 빤다.


혜정
너도... 한번 피워볼래?


정치
아니. 난 담배 안 피워.


혜정
(웃으며)
네 눈을 보면 말이야, 마음이 편해져. 꼭 거울 같아. 맑고 깨끗해서. 네 눈에서 진짜 혜정이가 보여. 너, 나랑 친구 해줄래?


정치
친구가 뭔데?


혜정
음... 그냥 내 편.


멀리서 혜정을 부르는 김 선생님(혜정의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린다.
혜정이 황급히 담뱃불을 끈다.


혜정
(정치에게 속삭이며)
지금부터 우린 친구다.


혜정은 골목을 빠져나간다. 골목에 남은 정치, 김 선생님과 눈이 마주친다.


정치 (V.O.)
심장 소리가 들렸다.


28. MONTAGE


학교 옥상, 혜정이 정치에게 무언가 이야기하고 있다.
텅 빈 교실, 혼자 남아 공부하는 혜정. 정치가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본다.
운동장을 함께 걷는 혜정과 정치.
교무실 창문, 김 선생님이 두 사람을 걱정스럽게 본다.


29. INT. 교실 - NIGHT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는 종이 울린다. 김 선생님이 잠든 정치에게 다가온다.


김 선생님
정치야. 잠깐 선생님 좀 볼 수 있을까.


30. INT. 교무실 - NIGHT


정치가 교무실로 들어선다. 다른 선생님들은 모두 퇴근하고 김 선생님의 책상 스탠드만 켜져 있다.
정치가 의자에 앉아 기다린다. 책상 위에는 중간고사 시험지와 답안지가 놓여있다.
그때, 김 선생님이 들어오다 정치를 발견하고 황급히 달려온다. 책상 위 시험지를 서랍에 부랴부랴 집어넣는다.


김 선생님
(당황하며)
정치야... 봤니?


정치
뭐를요. 시험지랑 답안지요?


김 선생님
(한숨)
...봤구나. 오늘 여기 왔던 일은... 모두 비밀로 하자.


31. EXT. 학교 옆 골목 - DAY


혜정
정치야! 나 이번 중간고사 1등 했어!


혜정이 기뻐하며 정치의 목에 목걸이를 걸어준다.


혜정
우정 목걸이다.


32. INT. 교실 - DAY


학생들이 혜정을 둘러싸고 수군거린다.


학생 1
야, 혜정이 1등 했대. 말이 된다고 생각해? 아빠가 담임이잖아.


학생들이 혜정에게 시비를 걸고, 이내 머리채를 잡고 싸운다.
여러 학생이 혜정에게 달려들어 발길질한다.


혜정
(작은 목소리로)
정치야... 도와줘.


정치, 혜정에게 달려들어 그녀를 감싼다. 학생들의 주먹과 발길질이 혜정 대신 정치에게 쏟아진다.


정치
괜찮아. 난 아프지 않아.


정치의 이마에서 피가 흐른다.


33. EXT. 학교 교문 앞 - DAY


'입시 비리를 밝혀라'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학부모들이 시위 중이다.
하교하던 혜정을 학부모들이 둘러싸고 소리친다.


학부모 1
바로 저년이야! 도둑년!


김 선생님이 달려와 혜정을 보호하려 하지만, 학부모들이 던진 날달걀에 맞는다.


34. INT. 정치의 집 - NIGHT


잠든 정치. 창문에 돌멩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린다.
창문을 여니, 아래에 혜정이 서 있다.


35. EXT. 정치의 집 앞 - NIGHT


가로등 불빛 아래, 혜정과 정치가 서 있다.


혜정
(정치의 눈을 보며)
넌... 나 믿어?


정치
...


혜정
우리 친구 맞는 거지?


정치
응. 우린 친구잖아. 네 편.


혜정이 정치를 꼭 껴안는다.


혜정
고마워... 나 내일 검찰청 가. 안녕, 친구.


혜정은 뒤돌아 뛰어가며 손을 흔든다.


36. INT. 법정 - DAY


증인석에 앉아있는 정치.
판사, 검사, 그리고 피고인석의 김 선생님과 변호인이 보인다. 참관석에는 혜정과 학부모들이 앉아있다.


검사
노정치 학생, 진실만을 말해야 합니다. 그날 교무실에서 피고인의 특이점을 발견하지 못했습니까?


정치가 눈을 감는다.


37. INT. 검찰 조사실 - NIGHT (FLASHBACK)


거만한 표정의 검사가 책상에 다리를 올리고 있다.


검사
정치야, 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 너도 좋고, 나도 좋고, 국민 모두가 좋은 방법을 선택하면 되는 거야.


38. INT. 법정 - DAY (현재)


참관석의 학부모들이 소리친다.


학부모 1
바른대로 이야기해! 너도 공범인 거 몰라!


39. INT. 동네 빵집 - DAY (FLASHBACK)


학부모들이 정치를 둘러싸고 빵을 사주며 회유한다.


학부모 3
혜정이가 너한테 중간고사 관련해서 한 이야기 없어?


정치
제가 본 혜정이는 누구보다 노력했고,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40. INT. 법정 - DAY (현재)


검사
다시 묻겠습니다, 증인. 그때 무엇을 보았나요?


정치
...전 사실을 모릅니다. 그날 저녁, 김 선생님의 책상에서 중간고사 시험지를 봤을 뿐입니다.


검사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검사
시험 이틀 전에 중간고사 시험지와 답안지를 미리 봤다는 이야기인가요?


정치의 눈에 고개를 숙인 혜정의 모습, 환호하는 학부모들의 모습이 보인다.


정치 (V.O.)
뭔가... 잘못되었다.


검사
(큰 소리로)
증인!


정치
(힘없이)
...네.


김 선생님이 고개를 떨군다. 혜정의 얼굴이 슬픔으로 일그러진다.


41. EXT. 법원 앞 택시 승강장 - DAY


정치 앞에 혜정이 나타난다.


혜정
(눈물을 글썽이며)
...아니. 너다운 행동이었어. 우리 친구 맞지? 내 편.


정치
응. 넌 내 친구야. 네 편.


혜정이 택시에 올라탄다. 학부모들이 정치에게 몰려와 '고맙다'고 말한다.
정치의 시선은 떠나는 택시에 고정되어 있다.
택시 창문에 비친 정치의 모습이 순간, '악마'처럼 보인다.


정치 (V.O.)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혜정이를 본... 어쩌면 난, 혜정이의 인생을 망친 악마였을지도 모른다.


42. MONTAGE


김 선생님이 구치소에 수감된다. 옆에서 학부모들이 환호한다.
학교 옥상 난간에 혼자 서 있는 혜정. 그녀는 목에 걸린 우정 목걸이를 운동장 아래로 던진다.
혜정이 옥상에서 뛰어내린다. 운동장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다.


정치 (V.O.)
진실은 알지 못한다. 내 말 하나로 모든 일은 사실이 되어버렸다. 난 하나뿐인 내 친구 혜정이를 지켜주지 못했다.


43. INT. 시상식장 - DAY


'참여연대 올해의 의인상' 시상식장.


사회자
올해의 의인상은, 학교 입시 비리를 고발한 노정치 군입니다!


객석에서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온다. 시상식장 천장의 유리에 박수 치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비친다.
그들은 모두 뿔이 달린 '악마'의 형상을 하고 있다.


정치 (V.O.)
사람들은 원하는 세상만을 바라본다. 그 세상이 거짓이건, 사실이건 간에. 혜정이가 없는 학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난, 학교를 떠나야만 했다.


44. INT. 정치의 고시원 - MORNING


4-5평 남짓한 고시원. 침대, 책상, TV가 전부다. 한쪽 박스 안에 '올해의 의인상' 등 상패들이 어지럽게 놓여있다. 정치가 눈을 비비며 일어난다. 벽에 걸린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본다. 그리고 해맑게 웃는다.


정치 (V.O.)
학교를 떠난 뒤, 난 대기업 소속의 군수공장에 취업했다.


45. MONTAGE



정치, 자전거를 타고 공장으로 향한다. 공장 선배들이 그를 반갑게 맞이한다.


정치, 작업대 앞에 앉아 화약, 로켓 부품 등을 조립·용접한다. 땀을 흘리며 일에 집중하고 있다.


점심시간, 식판에 담긴 김치, 시금치, 미역국을 맛있게 먹는다.


은행 ATM 앞에서 통장 잔고를 확인하며 미소 짓는다.



정치 (V.O.)
공장 일은 내 적성에 맞았다. 아무 생각 없이 나사를 조립하고 부품을 연결했다. 많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 월급이면 나 혼자 먹고 살기에 충분했다. 복잡한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다. 나쁘지 않은 삶이라고 생각했다. 이 녀석을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46. INT. 회사 식당 - LUNCH


정치가 밥을 먹고 있다. 작업복을 불량하게 걸친 꺼벙이(30대 초반)가 나타나 정치의 옆자리에 식판을 내려놓고 앉는다.


꺼벙이
에이, 시벌. 맨날 밥이 이따구야. 봐봐, 미역국 안에 고기가 없어. 안 그래요, 형님?


정치
아, 예.


꺼벙이
아까 보니까 일 좀 하시던데. 제가 군수 공장은 처음이걸랑요. 저 일 좀 가르쳐주시면 안 되나요? 앞으로 형님으로 모실게.


정치
공장 일이 별거 있나요. 그냥 하면 되는 거죠.


꺼벙이
오케이. 그럼 오늘 우리 도원결의를 맺었으니께, 오늘 저녁 일곱 시, 공단 앞에 ○○ 고기집에서 봅시다!


꺼벙이, 정치의 대답도 듣지 않고 사라진다.


47. INT. 고깃집 - NIGHT


정치가 어색한 표정으로 고기를 굽고 있다.


꺼벙이
에이 시벌, 내가 형이었어. 근데 왜 이렇게 얼굴이 삭았냐?


꺼벙이가 담배에 불을 붙여 연기를 정치 쪽으로 내뿜는다.


꺼벙이
씨발, 사실은 똥통 같은 현실이거든. 근데 문제가 뭔지 알아? 이렇게 뿌옇게 흐려지니까 존나 멋있다고 느껴지는 거야.


반대편 테이블. 노동조합 조끼를 입은 남자 7명이 술을 마시며 푸념하고 있다.


노동조합원 1
회사가 어째 깡패를 고용한대요. 심야 노동 좀 줄여 달라고 했다고 다 내쫓고...


꺼벙이
(일어나며)
아이 씨발. 존나 우울하게 만드네. 술맛 떨어지게.


노동조합원 2
뭐야 저 새끼들. 회사 측 용역 깡패들 아니야?


노동조합원 1
(정치를 가리키며)
아니야. 저 새끼 알아. 노조 가입도 안 하고 그냥 회사에서 일하는 놈들이야. 배신자 새끼들.


노동조합원 2가 소주병을 들고 정치의 테이블로 다가온다. 꺼벙이는 슬쩍 몸을 피한다.


노동조합원 2
너 지금 우리 무시하는 거냐?


노동조합원 3이 흥분해서 정치에게 주먹을 날린다. 조합원 여럿이 정치에게 달려들어 폭행을 가한다. 정치는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다. 맞으면서 식당 거울에 비친 조합원들의 모습을 본다. 그들의 머리 위로 붉은 뿔이 희미하게 보인다.


정치 (V.O.)
아프지 않다.


정치는 의식을 잃는다.


48. EXT. 공장 앞 - MORNING (며칠 후)


얼굴에 상처가 난 정치가 자전거를 타고 공장으로 향한다. 공장 앞에는 수백 명의 노조원들이 '사장과의 면담'을 요구하며 시위를 하고 있다.


노동조합원 1
(정치를 가리키며)
이 배신자 새끼야!


정치를 향해 침을 뱉는 노조원들. 그 틈에서 깃발을 흔들고 있는 꺼벙이가 보인다. 정치와 눈이 마주치자, 꺼벙이는 시선을 피한다.


49. INT. 공장 안 - MORNING


대부분의 기계가 멈춰있다. 정치와 외국인 노동자 몇 명만이 묵묵히 일한다. 공장 문이 열리고, 화려한 슈트를 입은 최 사장과 임원들이 들어온다.


최 사장
하여튼, 졸라 시끄러워.


최 사장은 일하고 있는 정치에게 다가온다. 하지만 정치는 작업에만 집중한다.


최 사장
똑똑똑. 웨얼 아유 프롬?


임원 2
(정치를 치며)
정치 씨, 사장님 오셨어요.


정치, 사장을 보고 가볍게 목례하고 다시 일에 집중한다. 최 사장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최 사장
(임원 1에게 귓속말로)
씨발 새끼. 태도가 아주 좆같네. 저 새끼, 우리 사측 노조 가입했어?


임원 1
아니요. 노조 가입 의사가 없어서...


최 사장
딱 걸렸어. 우리 편 아니면 적이잖아. 저 새끼 프락치라니까.


최 사장이 손짓하자, 쇠 파이프로 무장한 용역 깡패들이 정치에게 다가온다.


최 사장
(정치를 발로 밟으며)
시발. 사람답게 대해주면 사람답게 굴어야지!


최 사장과 용역들이 정치를 무자비하게 폭행한다. 그때, 공장 문이 부서지며 100여 명의 노조원들이 화염병을 들고 들이닥친다. 용역 깡패들과 노조원들이 팽팽하게 대치한다. 정치의 흐릿한 시선에 용역들, 노조원들, 그리고 최 사장의 모습이 보인다. 그들 모두의 머리 위로 악마의 뿔이 달려있다. 쓰러진 정치를 발견한 꺼벙이가 달려온다.


꺼벙이
(정치를 흔들며)
정치야! 무슨 일이야!


꺼벙이, 주위를 둘러보다 공장 구석의 CCTV를 발견하고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는다.


50. INT. 중앙노동위원회 회의실 - DAY


중앙노동위원회 위원장(김철민)이 앉아있다. 양옆으로 회사 측과 노조 측 사람들이 앉아있다.


위원장
정리 좀 하죠. 사측은 노조가 노정치 씨를 폭행했다고 주장하고, 노조 측은 회사가 노정치 씨를 폭행했다고 주장하고. 그런데 양측 모두 노정치 씨가 자기 조직 소속이라는 증거는 없고. 확실한 건, 노정치 씨가 양측으로부터 폭행당한 피해자라는 사실이네요.


위원장이 노정치의 증명사진을 말없이 응시한다.


51. INT. 중앙노동위원회 회의실 - DAY


정치가 증인으로 출석했다.


위원장
노정치 씨. 노조에 가입한 적 있습니까?


정치
없습니다.


위원장
왜 폭행당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정치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식당에서는 그냥 고기를 먹었고, 공장에서는 그냥 일을 했습니다.


위원장
노정치 씨에게 지금의 이 일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정치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며)
아침에 일어나 햇살을 맞이하고, 자전거를 탈 때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했습니다. 공장 일은 단순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일이었고, 맛있는 점심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냥... 그런 소소한 것들이 좋았습니다.


위원장이 정치의 눈을 유심히 본다.


위원장
(위원들에게)
공장에서 기름칠이나 할 놈이 아니야. 저 눈빛에 욕망이 숨어있어. 악(惡)이 가득 차 있다고. 저 놈은 지금 정치를 하고 있는 거야.


위원장이 웃는다.


위원장
우리 한번 좋은 영화를 만들어보자고. 전태일을 한번 부활시키는 거야. 썩어빠진 노조와 부패한 기업가를 날려버리는 그런 휴먼 스토리. 우리... 여의도로 가야지. 안 그래?


52. INT. 국회 앞 카페 - DAY


정치와 위원장이 마주 앉아 있다.


위원장
○○ 기업 건은 아주 나이스하게 해결됐네. 악성 사업주는 처벌받고, 부패 조합원들은 잘리고. 아름답고 순수한 정치 씨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지.


정치
저는... 계속 일할 수 있는 건가요?


위원장
(웃으며)
세상만사가 다 그런 거 아니겠어. 이제는 확실히 한 편에 서야지. 우리 같이 여의도로 갑시다. 정치를 해보자는 이야기야.


정치
전 정치를 잘 모르는데요.


위원장
(비열하게 웃으며)
허허. 이미 자네는 계속 정치를 하고 있는 중인데, 뭘.


53. EXT. 공장 앞 - MORNING


정치가 자전거를 타고 공장 앞에 도착한다. 수십 명의 기자들이 그에게 달려든다. 그때, 고급 차 한 대가 멈춰 선다. 차 안에서 꺼벙이가 손짓한다.


꺼벙이
정치야! 뭐해, 어서 타!


정치가 차에 올라탄다.


54. INT. 꺼벙이의 차 안 - DAY


꺼벙이
너 구하러 왔지. 나 몰라? 수호천사.


꺼벙이가 번쩍이는 시계를 자랑한다.


꺼벙이
내가 꿈이 원래 100만 유튜버였잖아. 영상 편집 좀 했지.


55. INT. 정치의 집 - AFTERNOON


지나치게 깔끔하게 정리된 정치의 집. 꺼벙이가 집을 둘러보다 상패가 가득 든 박스를 발견한다.


꺼벙이
(상패를 보며)
이 새끼, 장난 아닌데. 앞에서는 바보인 척하더니.


꺼벙이가 정치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다.


꺼벙이
김철민 위원장이 뭐라는데?


정치
한 배를 탔대. 여의도에 가자고.


꺼벙이
(해맑게 웃으며)
네가 정치를 왜 못해. 네 이름이 바로 정치인데! 그리고 이렇게 훌륭한 스펙이 있잖아.


56. INT. 양복점 - DAY


정치가 말끔한 양복을 입고 거울 앞에 서 있다. 꺼벙이가 뒤에서 정치의 입꼬리를 손으로 살짝 올린다.


꺼벙이
정치인은 늘 웃어야 해.


57. EXT. 유세 현장 - DAY


고급 세단에서 내리는 정치. 수많은 인파가 "노정치!"를 연호한다. 정치는 연단에 올라 연습한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에게 손을 흔든다.


58. INT. 선거 사무실 / 정치의 방 - DAY


사무실 벽에 '진실한 노동운동가', '내부 고발자'라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정치의 방. 꺼벙이가 의자에 거만하게 앉아 두 발을 책상에 올린다.


꺼벙이
정치 참 쉽지? 넌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 행동하고 움직이면 되는 거야. 내가 웃으라면 웃고, 슬퍼하라면 울고.


꺼벙이가 자신의 핸드폰으로 유튜브 영상을 보여준다. 중앙노동위원회에서 정치가 진술했던 영상이다. 감성적인 음악과 자막으로 편집되어 있다. 조회수가 100만을 넘었다.


꺼벙이
넌 국민을 감동시키는 노동운동가야. 사실이 아니라도 넌 그렇게 믿어야만 해. 나중에 갚으면 되는 거 아니겠어? 나라와 국민을 위해 열심히 일하면서.


59. INT. 선거 사무실 - NIGHT


TV 화면에서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된다.


아나운서 (V.O.)
기호 2번 노정치, 당선 유력입니다!


사무실에서 환호성이 터진다. 모두가 정치를 헹가래 친다. 정치는 덤덤한 표정이다. 꺼벙이가 국회의사당을 가리킨다.


꺼벙이
(귓속말로)
이제 진짜 스타가 되어야지.


60. INT. 국회의원 회관 - DAY


정치가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구석에 어색하게 앉아 있다.


61. INT. 정치의 국회의원 사무실 - NIGHT


꺼벙이가 한 목사로부터 서류와 돈 봉투를 받는다. 잠시 후, 정치의 방. 꺼벙이가 정치에게 투명 이어폰을 건넨다.


꺼벙이
차고 다녀. 앞으로는 어렵지 않을 거야. 내가 너랑 함께할 거니까.


62. INT. 국회 상임위원회 청문회장 - DAY


흥분한 야당 의원들 사이에서 차분하게 앉아 있는 정치. 뒤편 방청석에 앉은 꺼벙이가 주머니 속 작은 마이크에 대고 말한다.


꺼벙이 (V.O.)
정치야, 책상을 치면서 저 새끼 말 끊어.


정치, 시키는 대로 책상을 내리치며 장관의 말을 끊는다.


정치
잠시만요!


장내가 소란스러워진다.


꺼벙이 (V.O.)
"이것이 국민을 위하는 길입니까?"라고 말해. 그리고 나가.


정치, 카메라를 찾아 똑바로 응시한다.


정치
이것이 국민을 위하는 길입니까!


정치는 책상을 한 번 더 치고 회의장 밖으로 나간다. 기자들의 플래시가 터진다.


63. INT. 국회 복도 - DAY


방금 전까지 싸우던 여야 의원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웃으며 대화한다. 한 야당 의원이 정치에게 다가온다.


야당 국회의원 1
(흐뭇하게)
오늘 뉴스 탑은 자네가 차지하겠네. 연기가 너무 좋아. 하하.


정치 (V.O.)
난 국회에서 처음으로 화를 냈다. 그리고 처음으로 칭찬을 들었다.


64. INT. 정치의 차 안 - DAY


꺼벙이
연기 실력이 갈수록 좋아지고 있어. 후원금도 많이 늘고. 우리, 좀 더 스케일 크게 놀아볼래? 사람들이 좋아서 미쳐 날뛰게.


정치
그게 무슨 말이야?


꺼벙이
쇼! 쇼! 쇼!


65. INT. 국회 본회의장 - NIGHT


여야 의원들이 국회의장석을 두고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꺼벙이가 정치에게 다가온다.


꺼벙이
네가 잘하는 걸 할 기회가 왔어. 무조건 돌진해서 저 의사봉을 빼앗아. 우린 진짜 정치를 해야 하거든.


정치, 고개를 끄덕인다. 정치가 국회의장석을 향해 저돌적으로 돌진한다. 여야 의원들이 막아서지만, 힘없이 밀려난다. 마침내 정치가 의사봉을 빼앗는다. 흥분한 여당 의원들이 정치에게 달려들어 집단 폭행을 가한다. 정치는 쓰러지면서도 의사봉을 놓지 않고 높이 들어 올린다. 기자들의 플래시가 쉴 새 없이 터진다.


화면 가득 채우는 신문 1면. 헤드라인은 '정치 투사의 탄생'.


66. INT. 정치의 국회의원 사무실 - DAY


사무실 전화가 불통이다. 후원금 계좌는 마감되었다. 꺼벙이가 느긋하게 컴퓨터로 뉴스 댓글을 확인한다.


컴퓨터 화면 - "진짜 정치인 노정치!", "노정치 대통령 가즈아~~" 같은 댓글들이 가득하다.


꺼벙이
(흐뭇하게)
좋아. 계속 가보는 거야.


67. INT. 국회 본회의장 - NIGHT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가 진행 중이다. 꺼벙이가 엄청난 분량의 자료를 정치에게 건넨다.


꺼벙이
(귓속말로)
다음이 네 차례야. 그냥 이 자료를 끝까지 읽으면 돼. 오늘 밤, 역사를 한번 만들어보자고.


정치가 연단에 올라 자료를 읽기 시작한다. 시간이 흐른다. 12시간, 15시간... 많은 의원들이 자리를 비우거나 잠들어 있다. 뒤에 앉아있던 꺼벙이가 일어나 두 손으로 X 표시를 한다. 정치, 그제야 연설을 멈추고 비틀거리며 연단에서 내려오다 주저앉는다. 기자들이 몰려든다.


김 기자
필리버스터 세계 최장 기록입니다! 국민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없으십니까?


정치는 이어폰에 귀를 기울이지만, 꺼벙이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정치는 잠시 망설이다, 정치인들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을 떠올린다.


정치
(힘없는 목소리로)
...나라와 국민을 위해서요.


68. INT. 야당 당대표 사무실 - DAY


야당 당대표가 신문을 정치에게 던진다.


야당 당대표
보시게. 이번에도 자네가 또 1면이야. 자네는 초선임에도 우리 진영의 스타가 되었어.


당대표가 담배에 불을 붙인다.


야당 당대표
그런데 말이야, 누군가 자기 이익을 빼앗아 가면 그들은 반격을 하지. 여든 야든 상관없이. 자네도 이제 몸조심하게.


69. INT. 정치의 국회의원 사무실 - DAY


정치가 사무실로 들어서자, 꺼벙이가 여당 의원, 그리고 김 기자와 이야기하다 말을 멈춘다. 어색한 분위기.


70. EXT. 지역구 행사장 - DAY


정치가 주민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한쪽에서 꺼벙이가 지역 상인회 간부로부터 돈 봉투를 받고 있다. 행사가 끝나고, 한 기자가 정치에게 달려든다.


일요신문 기자
의원님의 병원 진단 기록을 확보했습니다. 인터뷰 부탁드립니다!


꺼벙이가 기자를 거칠게 밀치고 정치를 차에 태운다.


71. INT. 정치의 차 안 - DAY


정치
기자가 어떻게 진단 내용을 확보했지?


꺼벙이
신경 쓰지 마.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


72. INT. 병원 진료실 - DAY (FLASHBACK)


의사가 정치의 뇌 사진을 보며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의사
정치 씨, 외상에 의한 뇌출혈이 지속적으로 발생했습니다. 종국에는 뇌 기능 장애가 순차적으로 올 겁니다.


꺼벙이
의사 선생님, 이 내용은 일단 비밀로 해주셔야 합니다. 절대로요.


73. INT. 정치의 차 안 - DAY (현재)


정치가 감았던 눈을 뜬다.


꺼벙이
언론이 너를 물기 시작할 거 같아. 네 과거 이력, 병력을 다 검증할 태세인가 봐.


74. INT. 정치의 국회의원 사무실 - DAY


전화벨이 쉴 새 없이 울린다. 비서진들이 언론의 질문에 진땀을 빼며 대응하고 있다.


75. INT. 정치의 방 - DAY


꺼벙이가 다급하게 들어온다.


꺼벙이
(이어폰을 낀 정치의 사진을 보여주며)
에이, 시발. 이건 또 뭐야!


정치
꺼벙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꺼벙이
(말을 끊으며)
에이 씨발! 그딴 이야기는 절대 하지 마! 넌 국회의원이야. 모든 일은 너 스스로 결정한 거라고!


76. INT. 정치의 국회의원 사무실 - NIGHT


불 꺼진 사무실. 혼자 국회를 바라보는 정치. 전화벨이 울린다. 김 기자다.


김 기자 (V.O.)
지금 빨리 뉴스 채널 좀 켜봐요. 꺼벙이가 기자회견을 한다네요.


77. INT. 국회 기자회견장 - NIGHT


꺼벙이가 기자들 앞에 선다.


꺼벙이
전 오늘, 국민적 사랑을 받은 한 정치인을 고발하려고 합니다. 바로 노정치 씨입니다. 노정치 씨는 심각한 뇌 손상으로 국회 업무를 할 수 없는 상태이며, 특정 종교 단체를 대변하는 부패한 정치인입니다. 지금 이 사실을 폭로하는 것이 나라와 국민을 위한 올바른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78. INT. 정치의 국회의원 사무실 - NIGHT


TV 화면 속 꺼벙이의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는 정치.


정치 (V.O.)
꺼벙이의 폭로는 그렇게 마음 아픈 일은 아니었다. 더 큰 문제는, 꺼벙이가 내 곁을 떠났기 때문에 난 더 이상 정치를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79. INT. 야당 당대표 사무실 - DAY


야당 당대표
(담배 연기를 뱉으며)
정치 씨, 앞으로 어떻게 할 계획이에요? 대선을 앞두고 우리 당 지지율이 급락하고 있어요.


정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야당 당대표
나라와 국민을 위해서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세요.


정치
...네, 알겠습니다.


80. INT. 국회 로텐더 홀 - DAY


정치와 꺼벙이가 마주친다. 꺼벙이는 여당 당대표와 함께 있다.


여당 당대표
(비웃으며)
정치 씨, 오랜만이야. 어깨 좀 펴고 다녀.


81. EXT. 국회 앞 벤치 - DAY


정치와 꺼벙이가 나란히 앉아 캔 커피를 마신다.


정치
조만간 기자회견 할 것 같아. 국회의원 사퇴.


꺼벙이
(웃으며)
그래. 차라리 잘한 일이야. 몸 좀 추스르고.


정치
...고마워.


고급 세단이 멈춰 선다. 정치의 운전기사였던 김 기사가 내려 꺼벙이의 차 문을 열어준다. 꺼벙이는 머쓱한 표정으로 차에 올라탄다.


82. INT. 꺼벙이의 차 안 - DAY


꺼벙이
(통화하며)
회계자료 잘 정리했지? 빼도 박도 못하게 완전하게 만들어야 해.


83. INT. 여의도 카페 - DAY


김 기자가 정치에게 USB를 건넨다.


김 기자
내부 고발자인가 뭔가 하면서 깝치는 꺼벙이 좀 혼내주려고. 각본은 대충 짜놨거든. 최대한 기자회견을 늦춰. 영화 시작하기 전까지.


84. EXT. 광화문 길거리 - DAY


광장 전광판 뉴스 화면에 정치의 전 비서였던 김 비서가 모자이크 된 채로 인터뷰하고 있다.


김 비서 (V.O.)
(음성변조)
노정치 캠프에 있을 때 꺼벙이가 저를 성추행했습니다...


85. EXT. 신문 가판대 - MORNING


신문 헤드라인: '집권 여당 유력 비례대표 후보 꺼벙이의 횡령 의혹'


86. INT. 정치의 국회의원 사무실 - NIGHT


TV에서 시사 프로그램이 나온다. 김 기자가 출연했다.


김 기자 (V.O.)
노정치 씨는 피해자입니다. 회계장부 조작 등 모든 비리는 꺼벙이가 주도했습니다.


텅 빈 사무실에서 혼자 TV를 보는 정치.


87. EXT. 경찰서 앞 - DAY


꺼벙이가 포토라인에 선다.


꺼벙이
이건 정치적 음해입니다! 저는 위선적인 정치인을 고발했을 뿐입니다!


88. INT. 국회 비상계단 - DAY


어두운 계단에 걸터앉아 있는 정치. 야당 당대표에게서 전화가 온다.


야당 당대표 (V.O.)
정치 씨, 고생 많았어. 사퇴 기자회견, 그거 없던 일로 하게. 여당이 정치 씨의 장애를 이용했다는 점에서 국민적 공분이 엄청나. 우리가 이 이슈를 대선 때까지 끌고 가야 하지 않겠어? 그게 국민과 나라를 위하는 진정한 길이야!


정치
(나지막이)
...나라와 국민을 위해서요?


야당 당대표 (V.O.)
그렇지!


정치, 말없이 전화를 끊는다.


정치
(혼잣말로)
...나라와 국민을 위해서다.


89. INT. 기자회견장 - DAY


정치가 기자들 앞에 앉아 있다.


정치
안녕하세요. 전 '노정치'입니다. 맞습니다. 전 정치지만 정치를 잘 알지 못합니다. 아버지는 제게 정치를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근데 전 정치를 했네요. 바보같이.


정치는 준비된 기자회견문을 찢어버린다.


정치
그냥 전 제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국민을 위한 주변 사람들의 정치적 결정이 아닌, 제가 원하는 길을 가고 싶습니다.


90. EXT. 여의도 빌딩 옥상 - DAY


다시 첫 장면. 옥상 난간에 서 있는 정치. 멀리 국회의사당 앞에서 여야 시위대가 격렬하게 대치하고 있다.


정치
(혼잣말로)
꼭... '정자'들 같다.


빌딩 유리에 비친 시위대의 모습이 정자 떼로, 국회의사당은 난자로 오버랩된다. 뿔이 달린 악마의 형상들이다. 건물 유리에 비친 자신의 얼굴 역시 악마로 변해있다.


정치 (V.O.)
정치는 악마를 만들었다. 그리고 악마를 만드는 정치는 사라져야 한다.


정치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다.


정치 (V.O.)
아버지처럼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것은 답이 아니다. 정치가 있는 한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악마들로부터 나라와 국민을 지켜야 한다. 그래서... 나라와 국민 모두를 행복하게 만드는 진짜 정치를 시작하려 한다.


91. EXT. 군수 공장 앞 - NIGHT


정치가 자신이 일했던 군수 공장에서 무거운 짐을 차에 싣는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감돈다.


92. EXT. 국회 앞 - DAY


두꺼운 외투를 입은 정치가 국회를 향해 걷는다. 시민들의 환호와 욕설이 뒤섞인다. 정치는 국회 정문 유리에 비친 자신을 보며 환하게 웃는다.


93. INT. 국회 로비 - DAY


정치가 국회 안으로 들어서자, 여야 의원들이 그를 보고 반갑게 인사한다. 정치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 그저 밝게 미소 짓는다.


안내방송 (V.O.)
탄핵 관련 표결이 있을 예정이오니, 의원님들께서는 본회의장으로 입장해 주시기 바랍니다.


94. INT. 국회 본회의장 - DAY


국회의장이 의사봉을 두드린다. 본회의장 천장 유리에 비친 국회의원들의 모습은 모두 악마의 형상이다. 정치, 해맑게 미소 짓는다. 그가 입고 있던 두꺼운 외투를 벗어 던진다. 몸에는 공장에서 가져온 온갖 화약과 폭탄이 부착되어 있다. 몇몇 의원들이 그를 발견하고 경악하며 달아나기 시작한다.


정치 (V.O.)
아버지의 말은 맞았다. 정치는 사라져야 했다. 그리고 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 인생에서 정치적 결정을 했다. 나라와 국민을 위해서.


정치의 몸에 부착된 폭탄들이 일제히 폭발한다.


정치 (V.O.)
내 영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95. INT. 서울역 대합실 - DAY


대형 TV 화면에 긴급 속보가 뜬다.


앵커 (V.O.)
긴급 속보입니다. 국회의사당에서 테러가 발생했습니다!


역에 있던 시민들이 경악하며 TV를 본다.


96. EXT. 국회 앞 - DAY


폐허가 된 국회의사당. 소방관과 경찰들이 뒤엉켜 아수라장이다. 일부 시위대는 오히려 환호하며 국회로 진입하려 한다.


97. INT. 서울역 대합실 - DAY


TV 화면이 지지직거리다 꺼진다. 다시 켜진 화면에는 폐허가 된 국회의사당이 보인다.


정치 (V.O.)
난 어떻게 기억될까. 테러리스트? 아니면 나라와 국민을 위하는 진짜 정치인?


FADE 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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