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읽는 사람입니다.
지난주 싱가포르에서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행사가 있었다. 딱히 뚜렷한 고민이나, 법륜스님께 묻고 싶었던 질문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다만 유튜브로만 봤던 유명한 분을 실제로 볼 수 있다는게 신기해서, 그리고 싱가포르에 있는 한국분들이 어떤 고민들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가보게 됐다.
행사 며칠 전, 행사장이 열리는 YWCA 건물로 오는 법, 그리고 YMCA가 아니라 YWCA 건물이니 혼동에 유의하라는 친절한 메시지를 받았다. 행사 당일 지하철역에서 내리자, 갈래길마다 한국분들이 행사 안내 표지를 들고 있었다. 아마도 행사에 참석하는 것 처럼 보이는 한국 사람을 포착하면, 웃으며 방향을 안내해주는 듯 했다. YWCA 건물에 도착하니 법륜스님의 책을 판매하고 있었고, 행사 이후 책에 싸인을 받을 수 있으며 그때 책을 구입하면 번잡할 수 있으니 강연 시작 전에 구입하는 것을 추천한다는 안내 문구가 있었다. 행사 참석 신청부터, 강연장에 입장하는 순간까지 한국 사람들의 효율성과 일사분란함에 감동받았다. 사실 나도 친구들을 집에 초대하면, 아파트 입구에 내린 뒤, 어떻게 우리 집을 호출할 수 있고, 어떤 길로 집으로 오면 되는지를 찍은 동영상을 보내준다. 끝없는 최적화와 효율성을 추구하는 성향이 한국인의 피에 흐르는 게 아닐까?
강연장에 들어가니, 미리 질문 내용을 온라인으로 제출한 분들이 강연장 앞자리에 앉아있었다. 그 분들이 일어나 질문을 하고, 법륜스님이 답변해주는 형식이었다. 질문자분들의 사연 중에는 공감가는 질문들도 아주 많았고, 그 누가 들어도 객관적으로 딱한 상황에 처한 분도 있어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법륜스님의 답변은 영상 속에서 본 것과 같이 상당한 대문자 T 답변이었다. 거기에 법륜스님만의 유머가 더해지고, 삶을 꿰뚫는 통찰, 그리고 고통으로 번뇌하는 인간에 대한 법륜스님의 연민과 사랑의 마음이 느껴져서 인기를 끄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약 2시간의 시간 동안 진행된 강연을 들으며 느낀점은 아래와 같다.
사람은 모두 번뇌하며, 사람의 마음은 늘 바뀌기 마련이다. 그런 사람에게, 변하는 내 마음에게 연민의 마음을 가지자. 변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므로 견디기 힘든 마음과 생각이 들더라도, 이것 역시 지나갈 것임을 기억하자.
모든 상태는 상대적이며, 확실한 것은 변화가 생긴다는 것 뿐이다. 그것이 좋은 변화인지, 나쁜 변화인지는 나의 생각이지 객관적인 진리가 아니다. 세상은 나를 공격하지 않는다. 내 머릿속의 생각이 나를 공격할 뿐이다. 당신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그런 일이 생길 수도 있고, 당신과, 그리고 타인이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다. 나라고 특별하지 않으며 나라고 특별한 대우를 받을 이유는 없다.
지금 나의 행동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고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자. 스토아 철학의 핵심 아이디어다. 2천 년 전 에픽테토스가 말했던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법륜스님의 분류에 따라 여태 살아오면서 겪은 어려움들을 분류해보면, 20대 초중반에는 대부분 외부에서 오는 직접적인 압력으로 맞이하는 어려움들이 많았다. 그 이후, 30대가 넘어서 겪은 어려움들은 90% 이상 내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삶은 자기 개선 노력과 자기 수용 사이의 끝없는 균형 잡기라는데, 그때의 나는 아무도 나에게 불안을 강요하지 않았는데도, 쉬고 있으면 불안했다.
30대 중반에 가까워지는 지금은 마침내 내면의 평화를 찾았다. 주말에 아무런 자기 개발 없이 쉬어도 평화롭고,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조용한 나날들이 이어져도 평화롭다. 외부의 평가나 인정보다는, 내 스스로 만족스러운 하루를 보냈는지가 나에게 더 중요한 기준이 됐다. 외부의 상황은 내가 조절할 수 없는 영역이 훨씬 더 많으므로, 그냥 내가 좋아하고, 하고 싶은 것을 밀고 나가는게 정신 건강과 내 삶의 만족도를 높이는 길이란 것을 체화해나가고 있다. 이를 머리로 아는 것과, 일상생활에서 적용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실제로 내 삶에 적용하고 느끼는데에는 철학책이나, 소설책, 그리고 일기와 글쓰기가 엄청난 기여를 했다.
세상은 힘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것 같지만, 그리고 아마 대부분 그렇지만, 가끔 납득할만한 이야기, 즉 스토리가 힘을 얻어 변화가 생기기도 한다. 사람들이 모두 공통의 머리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설득력있는 이야기를 들으면 힘의 강약에 상관없이 설득될 수 있다는 것이 새삼 경이롭다.
힘에 의해서만 세상이 움직인다고 생각하면 회의주의자가 되기 쉽다. 하지만 경험과 성찰, 개선, 그리고 수용이라는 피드백을 거치면서 삶을 살고, 사람들 모두가 수긍할 만한 논리, 세상의 이치를 내 삶과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 체득하면서 깨달아가면, 그 길에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 힘을 모으기도 하면서 함께 변화를 만들거나 변화를 막을 수도 있다. 요즘 나에겐 이게 삶을 사는 재미다.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에 대해서 질문하고, 답을 얻고, 그 답들을 연결하면서 통용되는 이치를 찾고, 여기에 공감하는 사람들을 만나 같이 이야기 나누는 것. 잘 만들어진, 다른 사람들이 택하는 쉬운 길을 생각 없이 따라가기보다는, 스스로 고민하고 질문해서 내 길을 밟아나가기. 오늘 하루도 그렇게 살아야지.
최근 읽은 책들과 법륜 스님 강연을 통해서 이렇게 내 생각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음에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