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목적의 왕국으로 초대합니다
고등학교 사회윤리 시간에 배운 철학자 중에 제일 좋아했던 칸트와 밀. 그 둘의 책을 같이 읽어봤다.
임마누엘 칸트는 아직 종교가 도덕 윤리의 기본이었던 시대에 태어나, 왕권에서 시민으로 권리가 옮겨가는 프랑스혁명과 인간의 노동을 기계가 대신하게 된 산업혁명을 모두 겪으며 그야말로 가치관 대혼돈의 시대를 살았다. 그는 인간이 주체적으로 가지는 선한 의지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므로 모든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고 선언하면서 신 중심의 철학에서 인간 중심 철학인 근대철학의 문을 열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칸트를 역사적인 철학자로 만들어준 그의 첫번째 책 '순수이성비판'은 칸트가 57살이던 해에 출판됐다. 이 책 역시 내용이 너무 난해에서 초기에는 혹평과 무관심이 많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철학사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이전과 이후로 나뉘게 됐다고 말할 정도로 한 획을 그은 책이 됐다. KFC 할아버지, 무라카미 하루키와 함께 그야말로 대기만성의 아이콘..!
기술의 발전은 우리 삶을 편안하게 해주고, 그 편리함이 피부로 와닿기 때문에 위대함을 쉽게 느낄 수 있다. (에어컨의 발명처럼) 칸트가 이룬 철학적인 생각의 도약 역시 산업혁명 못지 않게 인류를 도약하게 만들었는데, '주체적으로 선한 의지를 가지는 인간 = 목적 그 자체'라는 칸트의 선언이 사람들의 일반상식이 되면서 후대에 노예 해방, 여성 참정권 획득 등의 진보로 나타났다. 이런 권리들이 이미 법적으로 보장된 상황에서 태어난 우리에게는 칸트가 이룬 생각의 도약이 가지는 의미와 중요성이 크게 와닿지 않을 수 있지만, 이것들이 당연하지 않았던 시대에서 순수하게 본인의 생각, 사고만으로 인류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것을 곰곰히 생각해보면 칸트의 업적이 얼마나 위대한지 가늠해볼 수 있다.
칸트가 인간 개인을 인류로 격상시킨 이후 많은 시간이 흘렀다. 인류는 기계가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게 된 산업 혁명을 지나, AI 혁명의 길을 걷고 있다. 생성형 AI 기술 개발과 보급으로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고 있고, 기술이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인간을 '수단'으로 다루게 되면서 생겨나는 문제점들을 일상 속에서 마주하고 있다. 블로그만 해도 AI로 포스팅과 댓글을 쓰는 영혼 없는 블로그들이 넘쳐나며,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 한명 한명과 연결되어 교류하는 것이 아닌, 단순히 내 블로그 방문자 수를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달리는 댓글과 이웃 신청이 대부분이다. 알고리즘은 컨텐츠의 사실 유무와는 관계없이 분노와 정의감을 일으키는 자극적인 컨텐츠를 사람들의 피드에 올려 앱 사용 시간을 늘리고 있다. 인간의 존엄과 AI 개발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윤리 문제들이 대두되고 있는 지금, 300년 전에 살았던 칸트의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는 그의 가르침은 여전히 유효하다.
존 스튜어트 밀은 칸트가 세상을 떠나고 2년 뒤인 1806년에 태어난 영국의 철학자로, 양적 공리주의를 주장한 제레미 벤담을 이어받아 본인의 철학 '질적 공리주의'로 발전시켰다. 그의 책 공리주의를 읽다보면 '이제 칸트 흠좀 그만 잡고 네가 하고 싶은 말을 해봐'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칸트를 쥐잡듯이 디스하며 글을 써나간다. 밀의 공리주의 철학을 읽을 계획이라면, 칸트의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를 먼저 읽고 밀의 책을 읽는 것을 권한다. 밀 역시 흥미로운 서사가 있는데, 이건 공리주의 독후감에 좀 더 자세히 적어보려고 한다.
칸트의 책은 어렵기로 유명하다. 추상적인 개념에 대한 내용이니 난해한 부분이 많지만, 철학 용어를 현대의 한국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신경써서 번역한 '이소노미아' 출판사 버전의 책으로 접해서 이해하기가 훨씬 수월했다. 책 서두에 번역하며 어떤 점들을 고려했는지에 대해 상세하게 적어놓은 부분이 인상적이었고, 책 뒷편의 편집자 여담도 칸트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
또 ChatGPT를 사용하면서 책을 읽으니 훨씬 이해하기 쉬웠다. 예를 들면 이렇게.
칸트에 대한 밀의 디스는 상당부분 언어의 한계 때문에 생기는 것 같다. '행복'이라는 단어의 정의만 더 날카롭게 하면 칸트와 밀도,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도 서로 비난하는 일이 훨씬 줄어들 것 같다. 어떤 단어가 널리 쓰일수록, 단어가 의미하는 바가 희석되어 뜻이 모호해지고, 오해가 생긴다. 행복을 예를 들어보면, 이 행복이 지속가능한 행복인지 (Eudaimonic), 아니면 일회성의 쾌락을 추구하는 행복인지 (Pleasure), 쾌락을 추구하고 나서 다음에 대가를 치뤄야 하는 행복인지 (Hedonic), 타인에게 가치를 더하는 행복인지, 타인이 아닌 나만 효용을 느끼는 행복인지, 아니면 타인의 행복을 앗아가면서 내가 누리는 행복인지 등....
칸트와 밀을 둘 다 읽어보니, 두분의 의견이 서로 대치하는게 아니라, 서로 다른 목적의 이야기를 할 뿐이라는게 느껴진다. 두분 다 위대하시고 대단한 사상가 입니다. 저는 두분 다 좋아합니다.
편집자 작성 부분
칸트는 사실상 계몽주의를 완성한 철학자이며, 그 완성은 개인이라는 주체성 확립으로 이해된다. 칸트는 도덕의 최고원리가 '의지의 자율성'에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실천철학, 즉 도덕철학에서 모든 인간이 목적이며 평등하다는 철학적 지평을 열게 된다.
자유는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어서 그저 우리 인간의 특성임을 전제할 수 있을 뿐이지 증명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실천 이성의 한계라고 칸트는 밝힌다.
칸트의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 본문
경험 무관한 원리만으로 원칙을 구하는 경우가 있고, 그것을 우리는 순수 철학이라 일컫습니다.
칸트는 종교/성경이 가졌던 지위를 인간의 이성이 넘겨받게 하기 위해, 도덕을 불변하는 성경처럼, 즉 경험에 따라 변하지 않는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차별화하는데 힘썼던 것 같다.
선한 의지는 그것이 실현하거나 성취한 결과 때문에 선한 것이 아니며,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쉽게 해주기 때문에 선한 것도 아닙니다. 그저 바라는 마음 덕분에 선합니다.
이성의 참다운 사명은 선한 의지를 낳는 것입니다.
지금 AI 개발에 필요한 명령어!
우리는 우리의 천성을 개선하는 것을 의무로 여기는 까닭에, 그런 천성을 지닌 사람을 통해 법률의 본보기로 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존경을 이룹니다.
보편적인 합법성: 내가 하고자 하는게 다른 사람들이 모두 하려고 해도 사회에 문제가 되지 않는가? 우리는 우리 행위의 좌우명이 보편적 법률이 되기를 바랄 수 있어야 합니다.
목적의 왕국. 보편 법률에 모순되는 어떤 좌우명에 따라서도 행동하지 말 것이며, 따라서 의지 그 자체가 자기 좌우명이면서 동시에 보편적인 입법자가 되는 것처럼 항상 그렇게 행동하라.
개인이 인류로 격상되는 순간
도덕은 이성적인 존재가 그 자체로 오직 목적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조건입니다. 도덕만이 목적의 왕국에서 이성적인 존재가 법률을 제정하는 입법의원이 되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