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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직업, 어째서 - 버지니아 울프

LLM이 일상화된 지금, 학교는 어떻게 변할까?

by 파일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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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rginia Wolf 버지니아 울프 (1882 - 1941)



'의식의 흐름'이라는 문학 기법을 창시한 20세기 가장 위대한 모더니즘 문학이자, 시대를 앞서나간 사유의 주인공 버지니아 울프. 그녀는 남편 레너드 울프의 헌신과 사랑 덕분에, 평생 정신병과 싸우면서도 글을 쓸 수 있었다고 한다. 자살로 생을 마친 그녀가 남편에게 남긴 마지막 문장은 이러했다.


"지금껏 우리보다 더 행복했던 두 사람은 없었을 거에요."




독립출판사 이소노미아에서 발간한 그녀가 쓴 세 편의 에세이와 일곱 편의 단편소설을 엮은 책 "여성의 직업"을 읽었다.


그녀가 살았던 시대로부터 10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우리는 똑같은 문제를 앉고 있다. 무엇이 변하고 무엇이 변치 않는 것인지 생각해보게 한다.






책 중에서

명목상으로는 길이 열려 있을 때조차도, 다시 말해 여성이 의사나 변호사, 공무원이 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게 아무것도 없을 때에도 여성의 앞길에는 수많은 환영과 장애물이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무엇인지 논의하고 실체를 규정하는 것이야말로 대단히 가치 있고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함께 노력할 수 있어야만 난제가 해결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 밖에도 우리가 어떤 목적과 목표를 위해 투쟁하고 있는지, 우리가 왜 우리 앞에 놓인 가공할 만한 장애물과 전투를 벌이는지도 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목표를 당연시할 수는 없습니다. 부단히 의문을 제기하고 검토해야 합니다.

여성의 직업 (Professions for Women), 버지니아 울프 (1931)



그녀가 이 수필을 쓴 이후 거의 100년이 지났다. 그동안 우리는 그녀가 말한 "여성의 앞길을 막는 수많은 환영과 장애물"을 충분히 논의하고 실체를 규정해왔을까? 그녀의 눈에 보기에 충분할까?


겉으로 보기에는 여성의 직업적 길은 열려있다. 여성 의사, 판사, 총리, 대통령까지, 그동안 많은 제도적 제약은 사라졌다. 하지만 울프가 이야기했던 '환영'은 여전히 살아있다. 여기에는, 아이를 나으면 여전히 여성이 주양육자가 되는 사회적 기대, 직업적인 성취와 가정 내 역할을 모두 완벽히 해내야 한다는 부담, 어떤 직업을 가지는 것이 가능하긴 하지만, 유리천장 때문에 겪는 승진이나 임금 격차, 그리고 여성 스스로가 내면화한 기준들이 있다.


이런걸 보면, 울프가 말한 '그런 목표를 당연시할 수는 없고, 부단히 의문을 제기하고 검토해야 한다'는 것은 여전히 유효하다. 더 나아가, 성별의 차이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관념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내 행동을 스스로 제약하는 것은 없는지 계속 질문해야 한다.






(대학교에서 수업을 듣는 것에 대해) 입으로 전해지는 말보다 훨씬 간단명료하게 온갖 뉘앙스의 의견이 글로 표현되고 있는 마당에 굳이 시대에 뒤쳐진 관습을 고집할 이유가 있을까요? 시간 낭비이기도 하고 신경질 나게 하는 데다 허영심, 과시욕, 주제넘은 자기주장, 과한 자기만족 같은 가장 천박한 인간의 열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한물간 관습이 왜 지속되어야 하나요? 어째서 평범한 남녀일 뿐인 연장자들을 스스로 학자 입네 하는 사람이나 선각자로 변신하도록 독려하나로 사십 분 동안 강단에 서게 만들면서, 정작 당신들은 그들의 머리카락의 색깔이나 파리의 수명 따위를 골똘히 생각하고 앉아 있습니까? 어째서 그들을 그냥 자연스럽게 놔둬서 마루에 앉아 기쁜 마음으로 당신과 얘기하고 당신의 말을 경청하게 하지 않는지요? 어째서 청빈과 평등에 바탕을 둔 새로운 형태의 모임을 만들지 않습니까? 어째서 남자든 여자든 나이가 많든 적든 유명인이든 일반인이든 모든 사람들이 한데 모여 딱히 강단에 오를 일도 없고 논문을 발표하거나 고가의 옷을 갖춰 입거나 비싼 음식을 먹을 필요 없이 서로 어울려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교육의 형태로서도 그런 모임은 유사 이래 발표된 예술과 문학에 관한 모든 논문만큼이나 가치 있지 않을까요? 어째서 학자인 체하는 사람과 선각자를 없애지 않습니까? 왜 인간적인 교류를 하지 않나요? 어재서 시도하지도 않는 거죠?

어째서 (Why), 버지니아 울프 (1934)



지금도 (2025) 너무 유효한 질문이다. 대안학교들이 생기긴 했지만, 교육의 풍경은 본질적으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책이 태블릿으로, 칠판이 전자칠판으로, 코로나 때에는 오프라인 강의실이 줌으로 바뀌는 등, 형식이 조금 변하긴 했지만 울프가 말한 '강단 위에 지루하게 수업하는 권위자와 수동적으로 앉아있는 학생들'의 구조는 여전히 건재하다.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 모두가 ChatGPT 등의 LLM을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지금, 우리의 교육이 앞으로 많이 바뀔까?



그렇진 않을 것 같다. 지금의 학교, 교육제도는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목적보다는 계층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작용한다. 그 기능은 충분히 잘하고 있기 때문에, 교육의 형식을 본질적으로 때려부술 유인이 없다. 부유한 계층의 자녀들은 상위권 학교에 진학해서 사회적, 경제적 자본을 강화하는 네트워크를 얻는다. 반대로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은 하위계층의 학생들은 제한된 기회와 정보 속에서 경쟁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구조적인 자원의 불평등에서 더 나아가 사회경제적 계층이 낮은 배경의 학생일수록 부정적인 자기 이미지(negative self-image)를 가질 가능성이 높고 (출처), 이것 역시 학업 성취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얼마나 슬픈가.



기술은 접근성을 높이고, 개별 학습을 지원할 수는 있지만, 학생들의 자기 이미지 형성에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 대안학교 같은 소수의 예외적인 경우는 있지만, 일반적인 교육제도의 계층 재생산 구조와 권위 중심적인 방식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학교와 교사는 LLM에 비해 낮은 수준의 지식 전달 역할을 수행하면서, 대신 평가와 인증에 더 치중할 것 같다.




그녀의 책을 읽은 결론은,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녀에게 자유는 바깥세상과 싸우기보다는, 자기 안의 억압과 싸우는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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