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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 작가 Oct 17. 2022

10월 15일 이지용의 하루

페스티벌

오늘은 오랜만에 음악 페스티벌이 열리는 날이다. 예전에는 락페, 재즈페, 내한 공연, 단독 공연 등 다양한 음악 관련 공연을 가곤 했다. 하지만 이젠 나이가 들어서인지 1시간만 있어도 체력이 떨어지는 게 느껴져 그런데를 잘 가지 않았다. 라인업도 그게 그거라서 특별할 것도 없었다. 역시 나이가 들어서인지 새로운 음악은 안 듣고 자꾸 예전에 듣던 음악만 들어서 요새 나오는 아티스트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탓도 컸다. 

며칠 전 공연 관련 일을 하는 친구로부터 티켓을 받았다. 원래는 자신이 가려고 했었는데 급한 일이 생겨서 갈 수 없어 나에게 준다는 것이었다. 요새 인기 있는 여러 아티스트들이 모이는 전형적인 페스티벌형 공연이었다. 나는 처음에는 거절하려고 했으나 오랜만에 바람이라도 쐴 겸 공연을 가보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 결국 티켓을 받았다. 친구가 준 티켓은 고맙게도 2장이었다. 너무 괜찮은 기회였지만 문제가 있었다. 같이 갈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핸드폰 연락처를 확인하며 누구랑 같이 갈까 고민했다. 정말 친한 친구 몇 명에게 연락을 해봤는데 다들 당일에 시간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눈에 들어온 사람이 있었다. 사심 하나 없는 여사친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정수진. 대학 시절 알게 되어 지금까지 나름의 우정을 쌓아오고 있는 친구였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대학교 때 약간의 썸이 있었으나 내가 용기가 부족한 탓에 이어지지 못하고 지금은 우정만 남은 케이스였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수진이에게 연락했다. 수진이는 1초의 고민도 없이 흔쾌히 공연을 같이 가자고 했다. 정말 쿨한 녀석이다. 나는 공연 당일 차를 가져가기로 했다. 공연장 가는 길에 수진이네 집을 들러서 그녀를 태울 계획이었다. 서로 무엇을 준비할지 이야기를 마치고 우리는 당일 날 보기로 했다.

어제 공연장에 갈 생각을 하는데 어딘가 모르게 마음이 설렜다.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공연을 봐서인지, 아니면 갑자기 수진이와 같이 가는 게 내 마음의 무엇인가를 자극한 것인지….

당일, 나는 차를 타고 수진이네로 갔다. 집 앞에 도착하자 수진이가 미리 나와있었다. 수진이는 작은 가방 하나를 트렁크에 실었다. 그리고 수진이가 내 옆에 앉았는데 오늘따라 그녀가 예뻐 보였다. 내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자 수진이는 ‘무슨 일이 있어?’라고 물었다. 나는 헛기침을 하고 ‘아무 일도 아니야. 가자.’라고 말하고 운전대를 다시 잡았다. 차를 타고 공연장으로 가는 내내 수진이가 신경 쓰였다. 생각해보니 그녀와 친구로 지내기는 했지만 이렇게 둘이 따로 만난 것은 썸을 타던 시절 이후 처음이었다. 그 이후에는 항상 다른 친구들과 함께였다. 이렇게 단 둘이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사실 거의 없었다. 덥지도 않은 날씨였지만 나는 괜히 식은땀이 났다. 나는 어색해서 노래를 틀었다. 오늘 보러 가는 아티스트들의 플레이리스트였다. 


“요새는 뭐 듣는 노래 있어?”


수진이가 갑자기 나에게 물었다. 나는 순간 당황해서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 운전할 뻔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그녀의 질문에 답할 준비를 했다.


“아니, 요샌 뭐….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듣던 노래만 듣는다.”


나는 최대한 어색하지 않게 그녀에게 대답했다. 하지만 원래 그녀에게 말하던 톤이랑은 확실히 달랐다. 나는 지금 내 마음이 그녀에게 들킬까 봐 조마조마했다. 아니, 그보다 그녀한테 아무런 감정이 없는데 내가 괜히 왜 이러나 싶었다. 내가 어색할 이유는 없는데 지금 너무 어색했다. 


“그래? 나는 요새 음악도 잘 듣는데. 아이돌 노래나 새로 나온 인디씬이나. 오늘 공연에 나오는 가수 중에도 좋아하는 애들도 있고. 근데 나도 예전만큼 열정적으로 듣지는 않는 것 같아…. 예전에 기억나? 우리 아주 옛날에 공연 갔던 거?”


수진이의 말에 나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 정말 옛날이었지만 약 8년 전에 수진이와 나는 둘이서 공연을 보러 간 적이 있었다. 썸을 타던 그 시절 말이다. 어우 젠장. 완전히 잊고 있었다. 내 기억에는 수진이와 잘 되고 싶어서 내가 어렵게 티켓을 구해 그녀에게 나름 데이트를 신청한 적이 있었다. 결과는 나쁘지 않았고 우리는 더 가까운 사이가 될 뻔했지만 그 이후는…. 이 사실을 완전히 잊고 그녀에게 다시 공연장을 가자고 한 꼴이 되었다. 그 말인즉슨, 내가 아직 그녀에게 미련이 남아있어서 데이트를 신청한 것이 되어버린 거고…. 그녀도 그걸 알고 있다면…. 아니, 알고 있는데도 지금 이렇게 묻는 의도가 무엇인 거지?


“아…. 맞다. 예전에 그런 적이 있었네. 미안 완전히 잊고 있었다…. 하하. ”


나는 굉장히 어색한 웃음을 보이며 그녀에게 말했다. 곁눈질로 그녀의 표정을 살폈는데 그녀는 살짝 웃고 있었다. 저 웃음의 의미는 대체 뭐지?


“그때는 굉장히 좋았는데…. 안 그랬어?”


의도를 알 수가 없는 질문. 아니 의도가 있을 것 같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아니면 모든 것이 내 착각인지 쉽게 판단할 수가 없었다. 어떤 대답을 해도 함정에 걸릴 것 같았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그녀에 대한 감정이 정말 없다면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그저 예전의 추억을 떠올리면 ‘그때는 좋았었지….’라고 하는 것이 맞았다. 


“어…. 맞아. 그때 정말 좋았지.”


나는 결국 모든 것을 숨기지 못하고 중의적은 표현의 대답을 했다. 그러나 이 말에 대해서도 확신이 없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니 그녀를 오늘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그저 내 친구였다. 오랜만에 그녀와 단 둘이 이야기를 하고 예쁘게 입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잠시 감정이 흔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를 여전히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오늘을 기회로 그녀와 더 가까워지려는 생각도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어색할 필요는 없었다. 

그 이후로 우리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어떠한 질문도 대답도, 추억을 회상하는 말도 없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나는 그녀까지 침묵을 지키는 것을 보고 또 이상한 착각을 하기 시작했다. 혹시 그녀도 나와 다시 잘 되고 싶은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오늘 나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것이고 예전 추억을 이야기하면서 넌지시 나에게 힌트를 주는 것이 아닐까? 모든 것이 헷갈렸다. 


공연장에 도착하고 우리는 평범하게 페스티벌을 즐겼다. 근처에서 맛있는 것도 먹고 잔디밭에 돗자리를 깔고 과자를 챙겨 먹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연인들이 가득했다. 저 멀리 어딘가에서는 썸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단체로 와서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무리들도 있었다. 우리는? 아주 평범했다. 가까웠지만 서로 그 이상 가까워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이 모든 것도 내 착각일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그저 평범하게 나를 대하고 있는 것이고 내 마음이 이상하게 설레서 그녀의 모든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나는 공연장의 분위기와 음악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고 지금 내 옆에 있는 그녀의 모든 행동과 말에만 집중했다. 이렇게 3시간 넘게 같이 공연을 보고 있으니 나는 마치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녀를 짝사랑했던 남자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렇게 더 시간이 지나고 저녁이 되자 페스티벌의 분위기는 더욱 낭만적으로 변했다. 지금 내 옆에 있는 그녀를 보니 나는 조금 더 용기를 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에게 언제부터 마음이 다시 생겼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오늘 그녀가 다시 좋아졌다. 지금이 어쩌면 나에게는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내가 그녀에게 더 다가가지는 못할지라도 앞으로 그녀에게 더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더 편안해졌다. 나는 음악을 들으면서 그녀와 옆에 있는 것이 좋았다. 선선한 가을바람까지 불어오니, 더욱 기분이 묘해졌다. 이 순간이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랐다.


공연은 10시까지 이어지는 것이었지만 저녁 7시쯤 되니 수진이는 갑자기 일이 생겨서 가봐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녀를 보내기 싫었다. 나는 그녀를 데려다주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지하철로 이동하면 된다고 했다. 나는 아쉬웠다. 이대로 헤어지기는 아쉬워서 나는 그녀를 지하철역까지 데려다 주기로 했다. 


“저녁 약속 있었어? 미리 말하지.”


나는 그녀와 걸으면서 아쉽다는 투로 말했다. 


“미안. 정말 갑자기 약속이 생겼어. 남친 어머님이 부르신 것이라….”


그녀의 말에 나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큰 충격을 받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 한 말이었다. 남친이라니?


“어? 어머님? 너 뭐야 만나는 사람 있었어?”


나는 최대한 괜찮은 척하려고 했지만 정말 어색하면서도 따지는듯한 말투로 그녀에게 물었다.


“몰랐나? 예전에 말했던 것 같은데. 아니었나? 이 말은 안 했나 보다. 사실 결혼도 준비하고 있어. 약간 고민되는 부분도 있지만…. 아니다 너한테 여기까지 이야기할 것은 아닌 거 같다.”


수진이가 아무렇지도 말하는 것이 화가 났다. 결혼까지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으면서 왜 오늘 나랑 공연을 보러 온 것인가? 그 미묘한 뉘앙스의 말들은 다 무엇인가? 날 가지고 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 하하 몰랐어. 내가 기억을 못 한 건가 봐? 그런데 남친도 오늘 나랑 공연 보러 오는 거 알아? 괜찮겠지?”


나는 그녀에게 약간 따지면서도 그녀의 남친을 걱정하는듯한 말투로 말했다. 


“얼래? 진짜 너한테 말 안 했나 보구나. 정말 미안해. 나 상민이랑 사귀고 있어…. 그래서 오늘 공연 보러 가는 거 문제없이 허락받았지.”


2차 충격이다. 상민? 김상민? 내가 아는 그 김상민 씨? 같이 잘 놀던 사이긴 했지만 지난 2년 동안 따로 연락한 적이 없던 친구였다. 물론 수진이랑도 잘 알고. 같이 놀았고…. 근데 김상민이랑 수진이가 사귄다고? 물론 상민이는 내가 수진이와 썸을 탔던 사이라는 것은 아마 모르는 친구 중 하나긴 했다. 어찌 되었건 간에 그가 수진이랑 사귄다는 것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어……. 진짜 이건 몰랐어. 김상민, 그래…. 어… 음….”


“음? 괜찮아?”


“어 괜찮지. 내가 안 괜찮을 이유가 무엇이 있어? 어? 지하철역이다. 이제 내려가. 짐은 다 챙겼지? 혹시 두고 온 거 있으면 내가 나중에 가져다줄게.”


나는 지하철역이 보이자마자 수진이를 빨리 보내고 싶었다. 이 어색한 분위기를 더 이상 느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 고마워. 나중에 상민이랑 같이 밥 한 번 먹자. 내가 근사한 데서 쏠게!”


“말이라도 고맙다. 그래, 조심히 들어가.”


손을 흔들며 지하철을 타러 가는 그녀를 뒤로 하고 나는 다시 공연장으로 향했다. 하루 종일 나 혼자 쇼를 한 날이 되었다. 그녀는 그저 오랜 친구와 함께 공연을 보러 온 것이고 잠시 예전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 나 혼자 착각해서 그녀에 대한 마음만 키워버렸다. 그리고 그 마음은 반드시 포기를 해야 하는 감정이 되었다. 그리고 언젠가 나는 수진이와 상민이의 결혼식에 가서 그들의 미래를 축복해줘야 하는 운명이 되었다. 방금까지 선선하던 가을바람은 어느새 차가운 바람이 되어 내 마음을 쓰리게 했다. 즐겁게 느껴졌던 음악 소리를 이제 소음처럼 들렸다. 날아갈 것 같은 마음은 이제 완전히 가라앉았다. 나는 쓸쓸히 잔디밭에 놓인 내 짐을 챙기고 집에 갈 준비를 했다. 당분간은 다시는 이런 음악 페스티벌에 오고 싶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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