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주 작가 Oct 18. 2022

10월 18일 손태훈의 하루

증오의 씨앗

태훈은 앞으로도 그때를 잊지 않을 것이다.

태훈은 어려서부터 소심한 성격 탓에 주변 친구들로부터 괴롭힘을 많이 당했다. 타고난 나약함을 극복하기 위해 태운은 운동까지 해봤지만 역부족이었다. 태훈이 저항하면 저항할수록 주변의 하이에나는 먹잇감을 더욱 괴롭혔다. 태훈은 선생님에게 자신이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일렀지만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선생님은 태훈의 의견을 무시했다. 


‘남자애들끼리 싸울 수도 있지 뭐’


고지식하고 그릇된 어른들의 시각은 어린 태훈에게 큰 상처가 되었다. 태훈은 결국 자신의 분노를 표현하지 않는 방법만이 자신이 살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알았다. 자신을 괴롭히는 무리에게 저항하지 않고 그들이 하는 말만 잘 듣는다면 자신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과연 태훈의 생각대로 무리들은 태훈을 이제 직접 괴롭히지는 않았다. 다만 이젠 정신의 영역이었을 뿐이었다. 

고등학생이 되자 태훈에게 새로운 희망이 생겼다. 태훈의 집이 원래 살던 곳에서 이사를 가면서 무리들과 완전한 작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태훈은 기뻤다. 태훈은 무리들과 다시는 엮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새로운 곳에서는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안녕? 태훈이라고 했지? 나는 현수라고 해.”


전학 첫날, 현수라는 남자애가 태훈에게 인사했다. 태훈은 자신에게 그렇게 다가오는 친구를 본 적이 없었기에 현수의 등장을 크게 경계했다. 현수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태훈에게 친근하게 다가갔다. 태훈도 그의 미소에 조금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었다. 

현수는 반장이었다. 공부도 잘하고 리더십도 있고 얼굴도 잘 생기고 집도 잘 사는 전형적인 반장형 인간이었다. 현수는 반장으로서 태훈이 새로운 학교에 적응하게 할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현수는 오직 의무로만 태훈을 대하지 않았다. 현수는 진심으로 다가왔고 태훈은 그와 친밀해졌다. 현수는 태훈의 고등학교 첫 친구가 되었다. 

현수는 항상 태훈에게 잘해주려고 했다. 태훈은 그런 현수가 너무 고마웠고 그가 필요한 것을 다 해주려고 했다. 현수는 자신이 친한 친구들도 태훈에게 소개해줬고 태훈은 그들과도 친해졌다. 중학교 때까지 하고는 전혀 다른 삶이 펼쳐지자 태훈은 즐거웠다. 태훈은 이러한 행복이 고등학교 내내 이어지기를 바랐다. 현수의 끝을 모를 악의를 발견하지 전까지는 말이다.

여름 방학이 되자 현수는 태훈을 자신의 집으로 불렀다. 태훈은 현수의 집을 보고 놀랐다. 현수의 집은 동네에서 가장 좋은 아파트였고 태훈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넓은 집이었다. 태훈은 현수가 부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까지 부자인 줄은 몰랐다. 현수는 웃으면서 아버지가 사업을 해서 그런 것이지 별로 놀랄 일은 아니라고 했다. 

현수의 방에는 만화책과 게임들로 가득했다. 현수는 태훈에게 언제든지 놀러 와서 게임을 해도 된다고 말했다. 태훈은 그런 현수가 고마웠다. 이후 태훈은 여름 방학 기간 내내 현수의 집으로 놀러 갔다. 집에 가면 태훈은 혼자 만화책을 보거나 게임을 했다. 절대 현수와 둘이서 무언가를 하는 법은 없었다. 태훈이 즐겁게 놀고 있으면 방 한 구석 책상에서 현수는 공부를 했다. 태훈이 같이 놀자고 하자 현수는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혼자 놀아도 된다고 했다. 태훈은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곧 그런 생활이 익숙해졌다. 현수는 공부를 하다가 그런 태훈을 지켜보며 무엇이 우스운지 혼자 킥킥댔다. 태훈은 그런 현수가 살짝 기분 나빴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언젠가부터 현수는 태훈에게 이것저것 심부름을 시키기 시작했다. 자신의 집에 놀러 온 손님인데도 자신에게 물을 가져와라, 뭘 가져와라 시키는 현수가 태훈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의 뜻을 따르지 않을 수는 없었다. 현수는 밖에서도 태훈을 부려먹었다. 자신이 학원을 다녀오는 길에 가방을 들어달라든지, 음료수를 사 오라든지 등 현수의 요구는 점점 지나쳐졌다. 


“우리는 친구잖아? 이런 부탁도 못 들어줘?”


어쩌다 한 번 태훈이 현수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한다고 말하면 현수는 항상 미소를 지으며 태훈에게 자신이 친구라는 것을 강조했다. 태훈은 어렵게 생긴 친구를 잃고 싶지 않았다. 태훈은 자신이 친구를 돕고 있다고 생각하고 현수의 요구를 계속 들어줬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현수의 무리들도 태훈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기 시작했다. 태훈은 저항하지 않았다. 


“오늘 부모님도 안 오시는데… 야 태훈아 너 얘랑 싸워봤냐? 얘 요새 복싱한다는데 한 번 싸워봐.”


평소처럼 현수의 집에 놀러 간 태훈은 현수의 명령에 크게 놀랐다. 집에는 태훈과 현수뿐만 아니라 같이 놀던 무리들도 있었다. 그중 가장 덩치가 좋은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그와 한 번 싸워보라는 것이었다. 태훈이 망설이고 있자 덩치가 좋은 친구는 그대로 태훈에게 주먹을 날렸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지만 태훈은 저항할 수 없었다. 덩치 좋은 친구는 너무 강했고 태훈은 너무 약했다. 태훈은 정신을 잃었다.

정신이 들었을 때 태훈은 입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고 현수와 친구들은 웃으면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현수는 태훈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에게 ‘괜찮아?’라고 하지 않았다. 그때, 태훈은 현수와 무리들이 자신의 친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태훈은 분노를 느꼈지만 중학생 때처럼 표출하지 않았다. 자신이 현수의 무리에게 저항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끔찍한 여름 방학이 끝나자 현수는 본색을 드러내고 노골적으로 태훈을 괴롭히고 다녔다. 태훈은 반장이라는 사람이 자신을 이렇게까지 대한다는 것이 이해가지 않았다. 다른 반 친구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었지만 그들도 현수를 무서워하고 있었다. 태훈은 어린 시절처럼 선생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고민했지만 바로 그만두었다. 학교에서 공부를 제일 잘하고 성적도 좋고 부모님이 학교에 영향력까지 행사하는 현수를 선생님이 안 좋게 볼리가 만무했다. 태훈은 그저 빨리 2학년이 되어서 현수에게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태훈의 바람과는 다르게 현수는 3년 내내 태훈과 같은 반이 되었다. 그렇게 현수의 괴롭힘은 2년 가까이 계속되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자 현수는 더 이상 태훈을 괴롭히지 않았다. 학업에 열중해야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현수는 아예 태훈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현수는 원래 친하게 지내던 무리들과도 멀어지고 공부를 잘하는 무리들과 어울려 다녔다. 현수의 그룹에서 이탈한 무리들은 현수 대신 태훈을 괴롭혔다. 하지만 그마저도 몇 달이 지나자 멈췄다. 누군가를 괴롭히기만 하기엔 너무 바쁜 고3들이었다. 어느 정도 학교 생활이 안정되자 태훈도 못다 한 공부를 했다. 

몇 달 후, 학교에는 현수막이 붙여졌다. 서울대에 들어간 학생들의 이름이 쓰여있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현수의 이름도 있었다. 며칠 동안 태훈은 등교할 때 교문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 저주받은 이름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졸업식 날, 현수는 태훈에게 악수를 청했다. 현수는 처음 봤던 그날처럼 미소를 짓고 있었다. 태훈은 그런 현수가 가증스러웠다. 하지만 태훈은 자신의 발톱을 드러내지 않았다. 태훈도 웃음을 지으며 현수와 악수했다. 


“잘 지내라.”


태훈은 이것이 자신과 현수가 나눈 마지막 대화이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 소원은 지난 10여 년 간 이루어지는 듯했다. 


.

,

.


“안녕하세요! 이번에 입사하게 된 손태훈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다들 잘 부탁드립니다.”


태훈은 새로 들어간 회사에서 팀원들에게 힘찬 목소리로 인사했다. 팀원들이 박수로 환호하는 가운데  한 남자가 태훈에게 악수를 청하며 걸어왔다.


“손태훈? 00 고등학교 손태훈 맞지? 야 이거 오랜만이다. 잘 지냈지?”


태훈이 남자의 정체를 확인하자 그는 떨리는 심장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태훈이 10여 년 간 잊고 싶었던 얼굴…. 바로 현수였다. 


“너…. 너 여기 다녔어?”


“난 여기 다닌 지 7년 정도 되었어. 짜식. 정말 반갑다. 야. 모르는 것 있으면 편하게 물어봐. 여기 사람들 다 착하고 일 잘해. 팀장님이 이번에 들어오는 애 똘똘하다고 했는데 그게 너였구나. 하하. “


태훈은 현수의 얼굴을 살피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어렸을 때 잘생김은 많이 사라진 현수였지만 그 속을 알 수 없고 가식적인 미소는 여전했다. 태훈은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

.


“현수님이랑 아시는 사이였구나. 현수님 엄청 가정적이고 좋으신 분인데. 태훈님도 그런 분이시겠죠?”


점심 식사 시간, 태훈은 급한 미팅 때문에 밖에 나간 현수를 제외한 다른 팀원들과 밥을 먹었다. 팀원들은 태훈과 이야기하며 현수를 꼭 언급했다. 그리고 그들이 언급하는 현수의 이야기는 모두 미담 밖에 없었다. 태훈은 그런 이야기가 너무 거북스러웠다. 태훈은 당장이라도 자신의 학창 시절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퇴근 시간, 현수는 태훈의 어깨를 두드리며 같이 집에 가자고 했다. 태훈은 서로 집의 방향이 달랐기에 현수와 오랫동안 같이 있지 못하는 것이 너무 감사했다. 


“그럼, 내일 보자. 정말 반갑다 야. 나중에 꼭 술 한잔 하자. 내가 쏠게.”


태훈은 스크린도어만 없었으면 그 자리에서 현수를 밀고 싶었다. 고등학교 내내 있었던 괴롭힘에 대해서 전혀 사과도 없고 지금 자기 앞에서 친한 척하는 현수가 너무 미웠다. 태훈은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현수를 죽이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그만큼 현수는 태훈에게 너무 큰 상처를 준 사람이었다. 

집으로 가며 태훈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태훈은 당장 내일 회사를 그만두고 싶었다. 그는 현수와 다시 마주 보며 일을 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다 태훈은 어쩌면 이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금 당장 방법은 없지만 회사에서 현수를 끝장내는 거야.’


‘사회적으로 완전히 매장시켜버릴까?’


‘다른 방법을 써서 회사에서 쫓겨나게 할까?’


태훈은 수없이 많은 생각을 했다. 모든 생각은 현수에 대한 증오심의 결과였다. 태훈은 10여 년 전 현수가 뿌린 증오의 씨앗을 다시 기억해냈다. 태훈은 미소를 지었다. 자신에게 갑자기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했다. 

이전 23화 10월 17일 민유석의 하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