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창 하나를 두고 삶과 풍경, 그 경계선을 왔다갔다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선명한 초록과 파랑으로 가득한 여름 장면은 한 편의 작품 같다. '와 역시.. 여름이 최고야..'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물론 이건 에어컨이 빵빵한 실내에서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35도를 육박하는 한낮의 여름을 바라볼 때 할 수 있는 말이다. 원래 어떤 것이든 겉에서 바라보는 것과 그 안에 속해있을 때는 확연히 다르다.
몇 해 전 겨울, 처음으로 남산 꼭대기에 올라가 바라다본 서울의 야경이 그러했다. 아무런 기대 없던 서울의 야경은 무척 아름다웠다. 노랗고, 붉은빛들이 빼곡히 서울 땅을 화려하게 수놓고 있었다. 화려한 불빛들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 불빛의 정체는 꽉 막힌 도로 위의 자동차 헤드라이트와 밤 9시가 넘은 시간에도 켜져 있는 사무실의 야근 불빛이었다.
그러고 나니 정체된 도로 위 자동차 안에서 운전대를 잡고 있을 어떤 사람, 아직도 사무실에 남아 뻑뻑한 눈을 비비며 일하고 있는 어떤 사람이 떠올랐다. 그 사람은 어제의 나이기도 했고, 조금 전의 나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아니다.
지금 이 순간 나의 삶은 남산 전망대에 올라가 난생처음 서울의 야경을 바라보며 감탄하고 있다. 꽉 막힌 도로 위의 자동차 헤드라이트와 늦은 시간에도 켜져 있는 사무실의 야근 불빛은 내게 그저 '풍경'일 뿐이다.
원래 '삶'과 '풍경'은 유리창 하나 차이다. 바로 옆에 있어서 다 보이는 것 같아도, 삶이라는 테두리 안에 들어가 직접 살아보지 않으면 그것은 내 삶이 아니다. 풍경은 내 삶보다는 쉬워 보이고, 멋져 보인다. 반대로 내 삶은 그저 어렵기만 하다. 그리고 내 삶은 볼 품 없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 보면 내 삶은 내가 아닌 타인에게는 그럴싸한 풍경이다. 또한 오늘 이 순간에는 어제 나의 삶은 풍경이 된다. 하지만 우리는 순간을 살아내는 인간이기에 자주 헷갈린다. 이 순간이 전부일 것만 같은, 영원할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진다. 내 삶이 내내 35도 땡볕 아래 머무를 것만 같기도 하고, 또 어느 날엔 실내 온도 25도의 에어컨이 빵빵한 실내에서만 머무를 것만 같기도 하다.
지금 정체된 도로 위에 있다고, 35도 땡볕 아래 있다고 너무 슬퍼할 필요는 없다. 내일이면 남산 꼭대기는 아니어도 동네 산 중턱에는 오를 수 있고, 그늘 아래에서 선풍기를 '강'세기로 쐴 수도 있다. 우리 삶은 참 얄궂어서 제멋대로 내 삶과 풍경을 수시로 바꿔버린다. 그러니 우리 마냥 주저앉지 말자.
삶이란 늘 그렇듯 덜 어렵게 살 수 있는 방법 따위는 없고, 풍경이란 늘 그렇듯 그럴싸하게 보이기만 한다.
내 삶이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일단은 살아내자.
유리창 너머 풍경을 살아내는 그 삶의 주인도 나와 같을 것이다.
세상에 쉬운 내 것은 없다.
내 것은 모두 어렵고 그렇기에 가치 있다.
저기 멀리 보이는 풍경이 아름다우면 아름다운 대로 느끼자.
삶이란 어쩌면 살아내고, 느끼는 것이 다이지 않을까.
이렇게 살고, 느끼다 보면
언젠가 내가 그려왔던 풍경 속에 내 삶이 담기는 날도 올 것이다.
우리 삶은 참 얄궂어서 제멋대로 내 삶과 풍경을 수시로 바꿔버리니까.
안녕하세요.
'사랑, 사람, 삶에 대한 단상집' 브런치북에는 오랜만에 올리는 글이네요.
요즘에는 바쁘게 출간 준비 작업과 '길었던 나의 원고 투고 일지' 브런치북 연재를 하고 있어서 이 브런치 북에는 소홀했었습니다..
분명 이 브런치북을 만들 때만 해도 짧든 길든 형식에 얽매이지 말고, 자유롭게 글을 올리자라고 다짐했는데 막상 글을 올리려니 이것저것 구색을 따지게 되어서 자주 올리지 않게 되더라고요.
얼마 전 새롭게 유입된 구독자 분들께서 예전에 올려놓은 제 글을 보시고 글들이 너무 좋다면서 정성스러운 댓글을 남겨주셨는데, '아차' 싶었어요.
특히나 브런치에는 제 인사이트 기반의 심리, 사랑, 삶에 대한 에세이를 좋아해주시는 구독자분들이 많이 계시는데 말이에요..
'완벽하지 않아도 부지런히 글을 써서 올려야겠다!' 다시 한 번 다짐했습니다.
오늘도 제 글을 찾아주시고, 끝까지 읽어주시고 느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