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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미 Jun 18. 2017

쪼그라든 귤

상처받지 않는 법은 없을까


멀쩡한 귤을 상온에서 오래 두면 딱딱하게 굳으면서 점점 조그맣게 쪼그라든다.

요즘 내 마음이 그러하다. 한번 쪼그라든 마음은 좀처럼 다시 펴지지 않는다. 뭘 해도 자신감이 생기지 않고, 사소한 말에도 쉽게 상처받는다. 세상만사 괴로운 일들만 가득한 것 같아 슬프다. 가장 친한 친구의 사소한 농담에 기분 상하지만 냉동 꽁치 마냥 쪼잔 해 보일까 봐 말을 못 하여서 슬프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나에게 털끝만큼의 관심이 없는 것 같아 슬프고, 어느 이의 굳은 표정을 보면 이유 없이 나를 오해하고 싫어하는 것만 같아 슬프다. 불교 사상 중에 이런 말이 있다.


“ 태어난다는 것은 괴로움이고, 늙어가는 것도, 병듦도, 죽음도, 미운 사람을 만나는 것도,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도, 욕심을 채우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뜻대로 되지 않는 인간의 마음 또한 괴로움이다. "

 - 구사 나기 류슌의 '반응하지 않는 연습'


한 마디로 말하면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괴로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의 첫 상처는 초등학교 1학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느 날 갑자기 담임 선생님께서 복도에 걸어 놓을 시를 지어오라고 내게 말씀하셨다. 교실에 홀로 남아 그림을 그리고 있던 나에게 찾아온 특별한 기회라 여겼다. 나는 그것이 정말, 당연한 사실인 줄 알고 밤새 기분 좋은 마음으로 ‘종이학’이라는 시를 짓고 조그마한 그림도 정성스럽게 그렸다. 하지만 선생님은 내 시를 복도에 걸어놓지 않았다.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며 혹시라도 걸려 있지 않을까, 하여 학교 전체를 여행하듯 서성거렸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잊어버렸거나, 잃어버렸거나 혹은 내가 쓴  시가 마음에 안 들었을 수도 있겠다. 내 기억의 오류일 수도 있겠지만 외향적이고 활발했던 나의 성격은 그 날 이후로 쪼그라든 귤 마냥 소심해져 갔다. 질문을 하는 것도 괜히 망설여졌고,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것조차 외면받을 가능성을 염두하여 움직이지 못했다.


혹시 나에게 문제가 있는걸까

‘외면’이라는 것은 참으로 큰 상처를 준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타인의 마음이 언제나 나와 일치할 수는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방은 원치 않을 수도 있고, 나의 생각이 언제나 옳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앞으로의 일들을 미리 알고 대비를 한다 한들 원치 않은 상황은 분명 생길 것이며, 상대방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생긴다고 한들, 내가 상상한 결과가 아니면 어차피 상처를 받게 되어 있다. 다시 말해 뭘 어떻게 하든 매 순간 괴로움과 마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상처들이 존재한다. 인간관계라는 무리에서 소외감을 느꼈을 때,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원하는 결과물이 나오지 않을 때, 타인에게 인정받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상처라는 거대한 파도가 물밀려 온다. 앞서 말했듯 결국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상처들과 마주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내가 상처를 받아 슬퍼하든 괴로워하든 냉동 꽁치 마냥 꽁해 있든 결코 그 누구도 나를 일으켜주거나 진심으로 헤아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의 상처의 큰 관심을 가져줄 만큼 다른 사람들은 그다지 한가하지 않다. 마음의 상처로 인한 치유법은 없다. 영원히 상처를 받지 않는 방법도 없다. 심지어 지나가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서 무릎에 상처라도 생기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이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아예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세상과의 단절은 상처받을 일도 물론 없지만, 행복도 즐거움도 성취도 없다. 아픔을 피하기 위해 살아가는 이유 자체를 포기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상처를 받았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 나는 내가 생각하던 사람이 전혀 아니었음을 마침내 인정하면 검은 수령에 빠져들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내 상처와 흉터를 마주하면서 도리어 강해진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습니다.

 - 파울로 코엘료의 '스파이'


내가 틀릴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쪼그라진 마음은 좀처럼 쉽게 원상 복귀가 되지 않는다. 그러한 고난을 분명 이겨냈을 적도 있었고, 시간이 흐름과 동시에그 상처가 저절로 무뎌진 적도 있다. 그렇게 많은 상처들과 마주하고 싸우고 비로소 현재 강해졌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무방비상태의 나로 다시 돌아온다. 사소한 것에 늘 상처받고 괴로워하는 나 자신을 보면 아직 까지도 나 또한 어찌할 도리가 없다. 좁쌀 같이 작은 마음을 가진 내 탓인 건지, 원래 정신력이 강하지 못한 것인지, 세심하고 예민한 성격 탓인 지, 이 모든 것이 조화롭게 합쳐진 것일 수도 있겠다. 다른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잘 살고 만 있는 것 같은데 왜 나라는 인간은 단 한순간도 바람처럼 지나갈 날이 없을까, 하며 한숨을 쉰다.

 

세상에서 가장 사실적인 순간과 마주하게 될 때, 상처의 크기는 비례하는 것 같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타인에게 싫은 소리를 하는 것이 힘들어졌다. 그 날 하루의 기분을 내가 망칠 것이 염려되어 최대한 돌려서 말하거나 숨기는 것에 익숙해졌다. 내 생각과 감정을 있는 그대로를 말한다면 분명히 기분이 상할 것이고, 상처를 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던 까닭은, 당연히 내가 그런 말에 쉽게 상처를 받아서이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추구하는 방식과는 달리 좋은 소리든 싫은 소리든 직설적으로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처음에는 그런 사람들을 피하고 싶었다. 사실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나를 공격하는 듯한 느낌이 강해 기분이 상쾌하지만은 않아서였다. 그러나 가만히 그런 사람들을 오랫동안 관찰하다 보면, 딱히 큰 악의를 가지고 말한 것이 아니라 그저 나와는 말하는 방식이 달랐던 것이다. 또한 그런 사람들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직설적으로 말한 들, 쉽게 상처를 받지도 않는다. 아, 그렇구나 하며 빠르게 인정하고는 복잡하게 신경 쓰지 않는다.

다시 말해 상처라는 것은, 사실을 외면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일시적인 흉터가 아닐까?


그래, 맞는 말이긴 하지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타인의 생각이 나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면 상처는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다. 사실이든, 사실이 않든, 나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그만인 것이다. 또한 차분하게 생각을 해보았을 때, 조금이라도 타인의 생각이 사실이라고 생각이 든다면 인정받고 받아들이면 된다. 내가 외면하고 피했던 사실을 누군가에 입으로 통해 들었던 것뿐인데, 왜 상처라고 생각하고 괴로워하고 슬퍼하고만 있는 것일까? 그저 사실일 뿐인데. 맞는 말을 하는 것일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결국 노력해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도 있고, 미운 사람을 매일 상대할 수밖에 없고, 뜻하지 않은 이별을 겪을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결국 세상만사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모두 풀리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내 상처에 대해 말을 걸어 보면 어떨까?


거기 잘 지내고 있냐는 말과 함께 미안하지만 나는 앞날에 좀 더 신경을 써야겠다고, 너를 껴안고 괴로워하기에는 내 시간이 너무나 아깝다고, 문득 생각이 날 때마다 안부를 물어보는 것은 어떨까.


따뜻한 햇살만으로 꽃은 피어나지 않는다. 가끔은 몇 방울의 빗방울이, 바람이, 약간의 먼지가, 거친 흙이, 나를 더 단단하고 찬란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냉동꽁치 옮기기 작전

글/그림 여미

커버사진 최영미

yeoulhan@nate.com


벌써 2017년의 반이 지났네요.

여름에는 영화 촬영이 있을 예정입니다. 좋은 소식 들려드릴게요.

앞으로도 좋은 글과 그림 계속 연재하겠습니다.

-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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