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미루고 미루다가 또 미루고

by 여미

미루는 일은 참 쉽고 행복하다.


1시간 뒤에 해야겠다, 아니면 내일 하면 되지, 다음 달부터 하면 되지, 그러다가 내년으로, 내후년으로 미루고 미룬다. 빨래를, 청소를, 겨울양말 구매하기를, 장을 보러 가기를, 부모님한테 연락하는 것을, 장롱을 정리하는 것을, 화장실 청소하는 것을, 세탁소에 가는 것을 쉽게 미룬다. 오늘도 내가 미룬 일은 수두룩하다. 그렇게 미루고 보니, 글쓰기도 참 쉽게 미뤄지고 있다. 언제 마지막으로 썼더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일기는 거의 매일 쓰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잘 정돈된 글을 마음 잡고 쓰기가 어렵다. 이것 또한 내가 잘 미루는 일 중에 하나이다.


반대로 절대 미루지 않는 일도 있다. 이를 테면, 몸의 작은 증상에도 화들짝 놀라서 병원에 뛰어간다. 그것은 발견 즉시 항상 당일에 이루어져야 하며, 미루면 미룰수록 '큰 병일지도 몰라' 망상은 갈수록 심각해진다. 혹시나 이 작은 증상이 트리거가 되어, 죽을병에 걸리는 것이 아닌가, 망상에 빠진다. 스트레스받기가 싫어서 얼른 나의 증상에 대해 원인과 해결방법을 병원에 가서 얻어와야 한다.


정기적으로 돈을 내야 하는 일도 미루지 않는다. 관리비, 카드값, 보험비 등, 해당 날짜에 맞게 꼬박꼬박 넣는다. 자동이체가 되지 않으면, 카드사에 문의해서 알아본다. 돈을 내지 않아서, 알림이 오는 것이 싫고, 연체가 되어 다음 달로 숫자가 누적되는 것이 싫다. 하루에 한 번 신장약을 먹는 것을 절대 잊지 않고, 마그네슘과 비타민도 가끔 챙겨 먹는다. 가족의 생일과 가장 친한 친구의 생일은 몇 달 전부터 기억하고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일주일에 3번, 새벽 요가를 절대 미루지 않고, 밥을 먹고 15분 산책을 절대 미루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남편에게 고맙고 사랑한다는 말을, 아직까지 미뤄본 적은 없다.


오늘도 수많은 할 일을 했지만, 또 그만큼 미뤘다. 머릿속에서 '해야 하긴 하지만 지금 당장 하지 않아도 죽지는 않은 일'을 수만 번 생각하고, 적당한 날짜를 조율한다. 그렇게 미뤄진 일 중에 기약도 없이 저 멀리 떠나가버린 일들도 많고, 도저히 할 엄두가 나지 않아 멈춰져 버린 일들도 많다. 그래도 한 가지 깨달은 진리는, 미루는 일은 언제나 달콤하다는 것이다. 내 마음대로, 아무런 책임감 없이, 너무나 손쉽게 미루다 보면, 갑자기 압박감이 사악 내려가면서 가장 편안한 침대에 누워있는 기분이 든다.


미루는 일을 몇 개월 동안 하다 보니, 벌써 11월이 다가오고 있고, 2025년이 끝나가고 있다. 결국 나는 미루기만 하다가, 올해를 또 보내버렸구나.


미루고 미루다가, 그렇게 90살이 되더라도, 다음 생이라는 것도 있지 않을까?

다음 생에는 오늘의 할 일을 미루지 않는 사람으로 되기를. 그때는 겨울 양말을 꼭 구매해야지.



커버사진 여미

글 여미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