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장되는 마음으로 과거 응시내역을 클릭한다. 3번. 그냥 '불합격'이라고 뜰 줄 알았더니 '결시'라고 떠서 내가 응시하고 떨어졌는지 아예 가지 않고 떨어졌는지 너무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맨날 돈 없다. 돈 없다 말하지만, 이 JLPT에는 결시로 15만 원 정도를 날렸다. 물론, 불합격까지 추가하면 25만 원이다. 2010년부터 도전한 6번의 시험에서 1개의 합격, 2개의 불합격, 3개의 결시의 결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기록에 남지 않았지만, 2020년에도 응시했는데, 그땐 코로나로 시험 자체가 취소되어 환불받았다. 자의든 타의든 이쯤 되면 프로 시험 불참러다.
정말 칼같이 구분하는 불합격 이유
항상 그렇지만 시험을 접수할 땐 의지가 넘쳐흐른다. 근데 그때 다 넘쳐흘렀나 보다. 시험에 가까워질수록 교재를 보는 게 아니라 눈치를 본다. 누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괜히 찔린다. 그리곤 이렇게 중얼거린다.
"아무래도 불합격할 것 같은데, 시험장 안 가면 교통비라도 아끼는 거 아닐까?"
머릿속에서 갑자기 떠오른 말을 입 밖으로 꺼낸다.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고 있던 친구 옆에서 놀다가 튀어나온 말이었다. 물건을 정리하며 이야기를 듣고 있던 친구와 꺄르륵 웃는다. 그렇게 튀어나온 말의 힘은 강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어, 좀 합리적인데?' 싶은 변명이어서 3번이나 써먹었다.
아무도 신경 안 쓰지만, 괜히 찔려 포장한 말은 나에게 너무 쉽게 '포기해도 괜찮아', '합격이 아니라 아예 안 보러 간 거니까 결과를 모르잖아?'라며 무거운 마음을 가볍게 만들고선 자존심을 매수한다. 결국 있는지 없는지 모를 자존심은 채운 것 같은데, 손에 들어와 있는 것은 없다.
차라리 응시라도 했다면. 서울 어딘가 어느 찰나의 시간에 가기 싫었던 그 공간에 나를 욱여넣었다면. 그 자리를 점유했으니, 부동산으로 따지면 가는 게 더 이득이었을까? 또 공부는 안 하고 쓸데없는 상상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정말로 고사장 근처의 부동산 가격을 검색하려다가 생각을 끊어낸다. 다시 시선을 단어장으로 옮긴다. 2023년 7월 시험을 대비하려 모의고사 봤는 데, 모르는 단어가 절반이더라. 정말 하기 싫은데 그래도 단어를 눈에 발라본다. 금세 떨어져 나가지만.
"人目を気にしますか?(다른 사람의 이목을 신경 쓰나요?)"
오늘의 단어 [남의눈을 신경 쓰다.]라는 단어의 뜻을 받아 적으며 선생님이 물어온다. 얼결에 눈이 마주친 나는 얼결에 일본어로 어색한 음정을 가득 실어서 "네"라고 답변한다. 그리고 다음 단어로 넘어간다. 일본어를 배우는 학원의 작은 공간 안에서도 나는 같은 수업을 듣고 있는 다른 학생들의 눈을 신경 쓰는 사람이었다.
人目を気にする人
다른 사람의 이목을 신경 쓰는 사람.
그것도 너무나도 신경 쓰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런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는 내가 마냥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이번에는 제대로 해보자고 3월부터 학원에 등록해서 7월 JLPT를 준비했다. 그 수업의 시작은 언제나 단어시험이다. 10개의 한자가 칠판에 써지면 나는 그 한자를 따라 답안지에 그린다. 그리고 그 옆에 히라가나를 적고 뜻을 적는다. 독학했다면 2-3일 차에서 단어 암기를 포기하고 똑같은 전철을 밟았겠지만, 나를 알고 있는 선생님의 눈이 내 답안지를 보게 된다. 나는 그 시선을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다.
올해 상반기 열심히 살았다
단어 시험 이후에는 새로운 단어를 배우고 말한다. 문장을 서로 돌아가며 읽고 독해 지문을 푼다. 바로 채점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답에 손을 든다. 학생수는 적으니 여기에서도 내가 틀렸는지 맞혔는지 선생님은 알 테다. 그 순간이 싫어서 나는 또 오늘 풀었던 지문을 다시 복습한다.
그렇게 다른 사람의 눈을 신경 쓰는 나는 학원을 다니기 시작한 뒤로 하루에 80 단어씩 제법 꾸준히 단어를 외웠다. 누군가 나를 평가한다는 사실과 평균 이상은 해야 한다는 내가 보여주고 싶은 모습에 꾸역꾸역 단어를 외우며 터덜터덜 학원으로 걸어간다. 거기에 하루에 지문 1개씩은 복습했으니 제법 뿌듯한 상반기를 보냈다. 이렇게 '공부하는 나'를 '보여주기 위해' 독학으로는 일주일만 유지해도 대단했던 기록이 3개월을 유지했다. 누군가 지켜봐야 움직이는 수동적인 인간처럼 보이지만 그 시선에 힘입어 나를 더 좋은 사람처럼 보이게끔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나를 조금 더 긍정적으로 평가해 보려 노력한다.
시험을 앞둔 6월 말. 5월보다 자신감은 떨어지고 타올랐던 의지도 점차 사그라들었다. 공부기간을 너무 길게 잡았던 탓일까. 한 것보다 해야 할게 많아 보여 포기하고 싶어 져도 주변의 시선이 신경 쓰인다. 3번이나 써먹은 너덜거리는 변명을 또다시 말하고 싶어 진다. 이번에 내가 시험을 응시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꽤 많다. 그래서 3일간 손 놓았던 단어장을 손에 다시 쥐어본다. 진짜 며칠 안 남았다. 이번 시험기간에는 그래도 조금 다른 말을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이번에 합격 못할 것 같아요. 12월에 N1 보는 건 너무 욕심이었나 봐요."
일단 행여 불합격되어 다시 N2반 수업을 듣게 되어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밑밥을 깔아 둔다. 그렇게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는 나는 '人目を気にする',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다.'를 외운다. 기계적으로 눈을 굴리며 다음 단어를 본다. '오, 공부하는 나 좀 괜찮은데?' 하며 또다시 나를 보지도 않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며 조금은 긍정적인 자의식 과잉으로 붙지 않는 단어를 눈에 발랐다.
조금만 걸어도 땀이 났던 여름도 지났다.
상반기 내내 출퇴근했던 회사도 퇴사하고 8월의 어느 날 합격자 발표일이 다가왔다. 결과는 합격. 내 눈치보기 공부법이 어찌어찌 위력을 발휘한 셈이다.
N2 탈출! 이제 N1이다!
올해의 목표 중에서 눈치보기로 한 가지 완료하게 되었다. 타인의 시선을 너무 많이 신경 쓴다는 사실은 마이너스의 느낌이지만, 그 시선을 신경 쓴 덕에 시험에 합격했다. 시선을 신경 쓰던 상황은 잊히고 나름 열심히 공부했던 상반기의 긍정적인 기억과 JLPT N2라는 자격증을 이력서에 입력할 수 있게 되었다. 취미로 시작한 일이 그다음 스텝을 준비하게 한다. 또다시 어딘가 합격해 일하게 된다면, N1을 목표로 공부해 보려고 새로운 직장과 학원의 거리를 확인해 본다.
매년 4월에는 명탐정 코난 극장판이 일본 극장가에 걸린다. 올해의 극장판을 재미있게 본 탓에 우스갯소리로 내년에는 일본에 직접 가서 코난 극장판을 자막 없이 보는 건 어떻냐는 제안을 해온 친구의 얼굴이 떠오른다. 과연 무자막으로 영화를 즐길 수 있을까? 스포일러만 왕창 당하고 돌아오게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