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 초단편 옴니버스 소설집 <사랑은 이상하고> 세 번째 소설
일주일이 지나자 변호사에게 전화가 왔다. 변호사는 자원봉사 차원에서 고모의 일을 돌봐주었으며, 그 외로운 사람에 대한 얼마간의 의리와 직업 정신으로 이 일을 하는 것이라며 투덜거렸다.
제 이야기를 귀담아듣기는 하신 거죠?
그 말을 듣자 최광록은 문득 변호사에게 미안해졌다. 누군가 자신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주지 않는다는 느낌, 최광록은 그 기분에 대해 잘 알았다. 그는 바로 다음 날 변호사를 만나 유산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유산이라는 말이 겸연쩍을 정도로 금액은 초라했다. 소소한 채무를 변제하고 나면 이백만 원 남짓한 금액이었다. 최광록의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보잘것없는 금액인 것에 그는 이상하게 안도했다. 그럼 그렇지. 내 삶에 그런 드라마틱한 일이 일어날 리가 있나. 그는 익숙한 실망을 반갑게 맞이했다. 금액은 적은 대신 고모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고모가 살던 집에 새로운 세입자가 들어올 수 있도록 그녀의 짐을 처분하는 일이 가장 급했다. 최광록은 주말에 시간을 내 한 번도 본 적 없는 고모의 집으로 향했다.
해안로2길 5-14번지 빌라 문을 열었을 때 그는 깜짝 놀랐다. 고모집이 최광록이 사는 투룸 빌라와 몹시 닮아서였다. 두 사람의 집은 ‘국민’자가 들어간 모든 제품이 전시된 쇼룸 같았다. 국민 침대, 국민 소파, 국민 테이블, 국민 스탠드. 최광록은 물건을 고를 때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는 걸 샀고, 집안을 보아하니 그의 고모도 그런 모양이었다. 다만 가구가 좀 더 낡고, 벽지에 세월의 때가 좀 더 끼었다. 식기 건조대에는 숟가락과 젓가락 한 벌, 그리고 밥그릇과 국그릇이 각자 하나씩 엎어져 있었다. 3인용 소파에서는 오랜 기간 혼자 한 자리에만 앉았는지 오른쪽 자리만 움푹 패여 있었다. 냉장고에는 고모가 여행한 곳에서 사 온 자석과 사진이 붙어 있었으나, 사진 속에서 고모는 대부분 혼자였다. 그마저도 누군가에게 부탁하지 못했는지 셀카로 찍은 게 많았다. 침대에는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이 엎어져 있었는데, 그건 최광록이 자기 전 틈틈이 읽던 책이었다. 최광록은 펼쳐진 페이지에서 고모가 밑줄 그은 문장을 발견했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여러분이 원하는 것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최광록은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책을 집어 던졌다. 고모집을 정리하면서 그는 그렇게 자주 물건을 던지거나 놓쳤다. 고모에게 온 우편물은 대개 고지서이거나 광고 찌라시였고(한 번도 편지인 적이 없었다), 고모의 사진첩에서 고모는 무리의 끝에 있거나 혼자였다. 최광록은 밤새 고모집 곳곳을 뒤적거렸다. 고등학교 생활기록부에 쓰인 선생님의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으나 성실함’ 따위의 말들이 그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고모의 퇴직 때 받은 듯한 롤링 페이퍼에는 ‘성실하고 좋은 동료’ 따위의 말들이 처연히 남아 있었다. 그건 최광록이 받은 롤링 페이퍼에도 적혀 있던 문구였다. 최광록은 고모의 오래된 데스크톱을 켜서 파일을 뒤적거렸고, 유선전화의 최근 통화 기록을 더듬어 올라갔다. 동이 틀 때까지 고모를 샅샅이 턴 후에, 최광록은 깨달았다.
고모의 인생은 최광록의 미래였다.
최광록은 덜컥 겁이 났다. 난장판이 된 고모의 거실에 앉아 최광록은 생각했다. 나도 고모처럼 혼자 늙어 죽겠구나. 아무도 내가 여기 있는지조차 모르겠구나. 세상에서 사라져도 그 사람이 사라진 것조차 아무도 모르겠구나. 있는 듯 없는 듯,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사람으로 살다가 외롭게 가겠구나. 나는 고모구나. 고모가 내 미래구나.
강렬한 고모댁 방문을 마치고, 최광록은 집에 돌아와 노트북을 켰다. 한글 파일의 깜박이는 커서를 노려보다 최광록은 제목을 이렇게 달았다. 『2024년도 최광록 삶 혁신방안』 보고서처럼 제목을 달자 그 후는 거침없이 써졌다. 기안일자, 시행일자, 처리기관, 시행부서, 관련 근거, 추진 계획, 기대효과. 최광록은 보고서에서 외로운 삶을 바꿔줄 첫 번째 추진 계획으로 스피치 학원 등록을 제안했다. 그가 보기에 하계 족구 대회 단체 사진에서 가장 중앙에 앉는 사람, 그 사람의 참석 여부에 따라 회식 참여 인원이 달라지는 사람, 무엇보다 한 번도 이름을 잘못 불려본 적이 없는 사람의 공통점은 말재주였다. 그는 고모의 200만 원을 이 혁신방안 보고서의 실행 예산에 쓰기로 마음먹었다.
스피치 학원에는 ‘성공시대’라는 간판과 알 듯 모를 듯한 홍보문구가 크게 붙어 있었다. 성공은 말에서 오고, 말은 성공에서 온다! 학원 앞 홍보 배너에서는 정장을 입은 채로 팔짱을 낀 채 어딘가 인공적으로 웃는 여자가 서 있었다. 수업비가 무려 세 달에 200만 원이라, 최광록은 입이 떡 벌어졌지만 어쩐지 이 모든 일이 운명 같기도 했다. 수업이 시작되자 강사는 ‘새 친구’가 왔다며, 모두 앞에서 그에게 학원을 등록한 이유와 미래에 기대하는 자신의 모습에 대해 발표하라고 말했다. 고등학생이나 되었을까 싶은 젊은 남자와 은퇴한 지 십 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노인과 팔뚝에 문신이 가득한 여자 둘이 그를 쳐다보았다. 최광록이 우물쭈물거리자 강사는 그의 신청폼을 열어 낭랑한 목소리로 지원동기를 읊었다. 인기도 많고 싶습니다! 쇼핑몰 안내 방송 같은 그 목소리는 최광록의 숨겨진 마음을 정오의 태양 아래 훤히 전시했다. 최광록은 오늘이 이 학원에 오는 첫날이자 마지막 날이 될 것이라 속으로 중얼거렸다. 마침내 치욕스러운 자기소개 시간이 끝나고 자리로 돌아갈 때, 최광록은 아까는 미처 보지 못했던 얼굴을 발견했다. 옆 부서 팀장, 배다정이었다.
<사랑은 이상하고>는 이상한 사랑에 대한 퀴어 초단편 옴니버스 소설집입니다. 매주 화요일과 토요일 브런치를 통해 공개합니다. <사랑은 이상하고>는 소설 배달 서비스 <주간 정만춘> Season1으로 2024년 여름, 연재했었던 콘텐츠입니다. <주간 정만춘>은 새로운 장르로 지금도 연재 중이니 신청을 원하시면 아래 링크를 클릭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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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요. 사랑은 다 이상하다고 생각해요.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요.
이상해 보이지만 듣고 보면 또 이상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변명. 자세히 보아야 멀쩡하고, 오래 보아야 이해가 되는 사람들에 대한 옴니버스 초단편 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