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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나 Mar 23. 2017

느린 여행

아이와 함께하는 여행의 속도

아이와 함께 걷는 길은 멀고 걸음은 느리다. 

얼이가 걸음마를 시작하고 난 뒤, 벅차오르던 기쁨과 감격은 잠시. 혼자서 빠른 걸음으로 걸으면 10분 남짓 걸리던 거리를 이제는 둘이서 두 시간 동안 걸어오곤 했다. 아이를 키우며 하루를 매시간 쪼개어 살고 손은 점점 더 빨라졌지만, 아이가 자라면서 일상의 속도는 점점 더 더디고 느려졌다. 사실 이 것은 많은 순간 곤욕이었다. 날마다 온종일 얼이와 함께인 나는 가까운 편의점을 가든, 무거운 짐을 들고 우체국을 가든,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든 언제나 얼이의 속도에 맞추어야 했다. 삶에는 산책로만 있는 것이 아니니 나는 때로 마음이 급했고, 언제나 할 일이 많았고, 대부분 무거운 짐이 들려있었다. 얼른 저 골목 끝까지 단숨에 걸어 목적지에 닿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는 걸음마다 멈춰서 흔들리는 나뭇잎과 떨어진 작은 전단지와 지나가는 고양이에 하나하나 손짓을 하며 말을 걸었다. 굴러가는 낙엽과 작은 돌멩이를 줍고, 뛰어가는가 싶으면 되돌아오고, 눈에 띄는 모든 것을 궁금해하며 한걸음 한걸음 경탄과 설렘으로 걸었다. 때로는 유모차에 태워서 혹은 아이를 안고 걷는 날들도 있었다. 아무래도 그쪽이 편하고 빨랐다. 하지만 나도 얼이와 손을 잡고 눈을 맞추며 걷는 편이 좋았다. 처음 아이와 오후 내내 작은 골목 하나를 천천히 걸어 집에 돌아왔던 날. 나는 비로소 그것이 여행임을 알았다. 동네를 그렇게 더디고 촘촘히 걸은 것은 그 날이 처음이었다.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돌아보며 감탄하면서 걷는 것도 이 전에는 해보지 않은 경험이었다. 시간이 도대체 얼마나 지난 건지. 집에 도착하고서야 알았다. 나는 그 날 얼이와 여행을 다녀온 것이었다. 집 앞 골목으로. 얼이는 내 일상을 여행으로 바꾸어 주었다. 그제야 내 마음도 재촉을 멈추고 조금 느긋해졌다. 

좀 더 어리고 에너지와 의욕이 넘치던 무렵 나의 여행은 지금보다 훨씬 빠르고 바빴다. 빠듯한 예산과 빡빡한 일정 속에서 하나라도 더 보려고 달음질을 쳤다. 밤늦게 숙소에 돌아와 하루 종일 돌아본 곳들을 헤아려보며 뿌듯하게 잠이 들던 날들이었다. 그때는 또 그대로 좋은 여행이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가 떠나는 여행은 조금 달라졌다. 얼이는 기차에서 잠시 만나 함께 놀았던 형아가 먼저 내리면 아쉬움에 눈물을 뚝뚝 흘리는 아이여서, 언제나 낯선 곳을 만나는 것보다 마음 주었던 곳을 떠나는 것을 더 힘들어했다. 그래서 우리는 여행의 속도를 늦추었다. 여행이란 이별이 예정된 연애 같은 것이니, 우리는 다만 주어진 달콤함 속을 더 천천히 거닐었다.

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은 자연히 모든 것이 느려졌다. 우리는 작은 도시로 떠나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에스토니아 탈린은 핀란드에 가면서 거리가 멀지 않아 일정에 포함시켰던 도시였다. 출발하기 전 책을 몇 권 찾아보았는데, 탈린은 아주 작은 도시여서 3시간이면 다 돌아볼 수 있는, 반나절이면 충분한 곳이라고 나와있었다. 해서 많은 경우 가까운 핀란드에서 페리를 타고 당일코스로 다녀오거나 발트 3국의 다른 도시들을 함께 둘러보는 듯했다. 우리는 그 도시에서 집을 빌려 하룻밤을 지냈다. 장을 봐서 아침을 차려먹고, 얼이가 탄 유모차를 밀면서 걸어 나와 도시를 한 바퀴 돌았다. 탈린이 좋아졌다. 시선을 두는 곳마다 세월이 켜켜이 쌓여 찬연하게 아름다운 골목과 집들도 좋았고, 걷다 보면 가려고 마음먹었던 곳들을 자연스레 모두 만나게 되는 작은 도시라서 좋았다. 같은 골목을 여러 번 지나가도 시간과 사람과 구름과 햇살이 그 위로 아로새겨져 시시각각 다른 길을 걸었다. 우리는 찬찬히 걸었다. 작은 풀꽃 앞에서도 머물며, 골목 하나를 오래 들여다보았다. 



느리게 여행하다보니 만난 순간. 성벽 위 작은 카페에서 새들과 치즈케이크를 나누어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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