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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명과 변명>의 한국 소년

'소년의 시간' 이해하고 질문을 통해 행동까지 (1)

by 태양이야기

넷플릭스 드라마 '소년의 시간'은 소년이 겪게 되는 시간에 대해 여러 사람들이 인지하고 있는 것과 현실의 괴리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런 차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에 대한 실마리를 몇 명의 등장인물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느꼈다. 소년의 아버지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그대로 반복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여전히 가부장적인 아버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에 반해 남자 경찰관은 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전혀 이해할 수 없지만 이해하려 노력한다.


우선 지금 어른이 된 사람들은 아이들의 삶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의 생활로 들어갈 수도 없으며 특히 핸드폰과 연결된 SNS를 어릴 때부터 사용했기에 절대 같지 않다. 그렇지만 이 사실은 알고 있다. 바로 호르몬의 영향이거나 학생 생활 특유의 상황으로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는 걸 말이다. 문제는 항상 발생하지만 그것에 대한 예방을 하려고 한다면 문제 상황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 왜 그런 일이 발생하는지? 어떻게 극단적인 상황까지 도달하게 되는지?


뻔한 것은 뻔한 이유가 있는 것이고, 바로 그 이유로 뻔한 것은 뻔하지 않게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뻔한 것을 뻔하게 만드는 바로 그 과정들을 우리는 뜯어봐야 한다. p.9


사실 우리는 이런 문제가 뻔하다고 생각한다. 그저 어리기 때문에 성숙하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라고만 생각하며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는다. 성숙하지 않는다던지 어리다는 게 어떤 걸 의미하는지 구체적이지 못하고 무엇을 말하는지도 이젠 모르겠다. 어른이면 성숙하지 않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건지 되묻고 싶다. 궁색한 이유를 대는 사람들 덕분에 어른인 사실이 부끄러워질 지경이다.


소년의 시간에 나온 문제와 비슷하게 지금 한국 사회의 양극화 담론도 비슷한 상황이다. 그런 면에서 '소년의 시간'과 <증명과 변명> 책을 나란히 두고 이야기를 나눠봤다. 이 책에 등장하는 우진은 누구보다 일반화되어 있지만 스스로 약자성을 느끼는 젊은 남성 이야기는 모래사장에서 바늘찾기 수준이다. 일례로 최근 한국 문학계에 남성 작가 또한 드물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되도록이면 우진 스스로 글을 써서 자신의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길 기대해보며 내가 생각하는 문제와 해결책을 적어봤다.


가치의 획일화


'소년의 시간'에서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인기다. 2화에서 라이언과 베스컴 경위의 대화를 통해 인기를 강조한다. 한국에서는 그럼 어떨까. 중요한 건 인기라는 게 아니다. 중요한 가치가 하나뿐이라는 사실이 상황을 극단적인 방향으로 몰고 간다. 아이들의 다양한 선호가 존중받아야 하지만 누군가에게 인기 있고 힘이 세고 영향력이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되면 인기 없는 아이들은 당연히 소외되고 패배의식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물론 형사의 아들처럼 소외당한다고 해도 제이미처럼 극단적인 행동을 하진 않는다. 그럴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말하고 싶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내 관점에서 보자면 성적이 가장 중요한 가치다. 이 책에서도 나오듯이 수능에서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던 것을 시작점으로 두고 있다. 다양한 가치가 존중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정말 너무 오래됐고 자주 이야기해서 지겹지만 여전히 그렇게 진심으로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아 작지만 자주 외치고 싶다.


그는 수능에서 수차례 미끄러지고, 연애를 시도하지만 반복적으로 실패하고, 만족스럽지 못한 대입 이후 대학을 자퇴하고, 취업을 시도하는 대신 주식 투자 등으로 살 길을 찾으려다가 이제는 개발자가 되어보려고 공부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우울과 강박이 있다. 그의 우울과 강박은 대입, 군대, 대학 자퇴와 '모태솔로' 등으로 구성된 삶의 경로 안에서 만들어졌고, 동시에 대입을 계속 시도하게 하고 군대 내에서 생활을 어렵게 하며 대학을 자퇴하도록 하기도 했다. 그는 사회에서 '1인분'을 함으로써 우울증과 강박을 극복하고자 했다. 그가 선택한 것은 주식 투자였고,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실패를 경험했다. 그리고 그는 이제 죽기 전 마지막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코딩을 배우기 시작했다. p.20


정형화된 남성 어른, 상상력의 부족


남자 어른의 등장에서 보이는 모습과 책에 나오는 우진의 '아버지들'이 겹쳐 보였다. 드라마 주인공은 제이미였지만 그가 자라면서 본 아버지, 소년원에 있을 때 봤을 남자들, 학교 생활에서의 선생님들이 등장하거나 화면 뒤에 있었다. 드라마에서 보이는 남성의 모습 중 형사만 긍정적이고 다들 부정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아마 제이미에게 괜찮은 성인 남성이 부재함을 극단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장치라는 생각이 들지만 현실과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난 모르겠다. 대신 이 책에서 실마리를 얻고 싶었다.


우진의 '아버지들'은 생물학적 아버지와 주식 투자의 스승과 같은 아버지였다. 우진과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부모와 다른 삶을 살게 된다. 그럴 때 부모 외에 조언을 받거나 롤모델로 여길 수 있는 어른을 아버지라는 표현으로 대신하는 것 같다. 어쩌면 남성중심으로 사회가 돌아간 지 꽤 됐기 때문에 남성들은 쉽게 사회적 아버지를 구할 수 있지만 여성들은 그렇지 않아 남성의 삶에 대한 이해도가 높기 어렵다고 느껴진다.


어쩌면 문제는 '아버지들'이었을지도 모른다. 수능은 포기하고 기술이나 장사를 배워서 돈을 벌라던 '성공한 가장'인 아버지를 이기고 싶어서, 그가 틀렸다고 증명하고 싶어서 우진은 수능을 여섯 번 준비했다... 아버지를 꺾든, 아버지가 되든, 중요한 것은 아버지 이상의 존재가 되는 것이었다.


주변에 여러 어른이 있지만 정형화된 남성으로 묶일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책에서도 '아버지들'이라고 퉁치고 넘어갈 수 있는 것 같다. 드라마에서도 여러 남성이 비슷하게 그려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상상력의 한계에 봉착했다고 표현하고 싶다. 창의력 또한 현실에 기반을 두고 그 위에서 여러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기반이 부실한데 다양한 남성이 나올 리 만무하지 않은가.


실패 그 이후


드라마에서 제이미는 케이티의 거절에 분노하여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자신은 결코 실패해서는 안된다는 생각도 원인 중 하나라고 본다. 책에서도 청년들의 계속되는 준비가 바로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제이미 또한 케이티의 사진이 유포되어 자존감이 낮아졌다고 판단되는 틈을 노려 환심을 사려했다. 실패하지 않기 위해 고심한 상황이었는데 실패하고 만 것이다. 이렇게 실패할 바에는 케이티를 없애는 데 성공하려 했던 것일까.


네가 생각하기에는 준비를 계속하는 이유가 뭐인 것 같아? 요즘 우리 또래나, 아니면 사람들이 이렇게 막 공부를 계속 더 하려고 하고 준비를 계속하는 거야. > 희제: 준비를 계속하면 실패는 안 할 수 있잖아. 뭘 해야 성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 하는 건데, 계속 준비를 하면은 실패를 안 할 수 있잖아. 성공도 안 하는데. p.240


이런 실패에 대한 마음은 단지 성공하지 못했다는 표현으로 부족하다고 책에서 이야기한다. '패배감'이라는 단어를 가지고 와 어떤 것을 상실했을 때 경험하는 감정이라고 말하니 이해가 된다. 제이미는 케이티가 자신에게 넘어올 거라 확신했을 것이다. 당연히 내 호감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니 상실감이 얼마나 컸을까 싶다. 흔히 사람들이 무언가 얻었을 때보다 잃어버렸을 때 감정 기복이 더 크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내 것이라고 했던 케이티가 거절했던 상황에 감정의 변화가 컸다고 짐작할 수 있다.


마음은 사회 구조 안에서 만들어지지만, 동시에 사회 구조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잉여를 품고 있다. 그러니까, 지금 다루는 것은 '실패'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패배감'에 대한 이야기다. 패배감은 물질적, 사회적 자원을 획득하지 못하거나 중요한 역할이나 지위를 상실했을 때 경험하게 되는 감정이다. 특히 경쟁과 성취를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끊임없이 타인과 비교하며 상대적 열등감을 느낄 때 패배감은 심화될 수 있다. 심리학 연구들에 따르면, 이러한 패배감은 우울뿐 아니라 불안, 자살사고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pp.259~260



해결책은 있는가


증명. 그것이 우진을 옭아매고 있는 가장 큰 단어라는 사실을 대화를 할수록 알아간다. p.165


책의 제목에 힌트가 있다. 증명과 변명. 우리는 무엇을 증명해야만 하는가? 꼭 증명을 해야 하나? 증명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변명하게 된다. 우진은 증명과 변명을 번갈아가며 하다가 지쳐갔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나 또한 증명하기 위해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들어갔다. 그리고 증명하고 나니 나에게 남는 게 없었다. 진짜 내가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그제야 찾기 시작했다.


증명이 과연 나쁘기만 할까 질문해 보면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스스로에게 증명해 보인다면 자존감이 높아지는 계기가 될 것 같다. 그러면 증명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드라마에서 처럼 부정당하고 그것에 대한 모멸감과 수치심 때문에 극단적인 폭력을 행사하게 되는 계기가 될까. 어쩌면 자존감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스스로에 대한 증명보다 다른 사람을 향한 증명을 더 우선하게 되면 역효과가 생기는 것 같다.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적 분위기. 그것이 필요하다. 쓰고 보니 말이 쉽다. 실제로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할지는 계속 이야기해 보겠다.


우진에게는 다른 언어가 필요하다. 또 한 명의 새로운 아버지가 아니라 다른 언어, 자신의 삶에 다른 방식으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언어가. 그래서 자신을 다르게 존재하게 할 수 있는 언어가. 언어가 부재한 곳에는 무엇이 남는가. 의미가 부재한 곳에는 무엇이 남는가. p.225
무엇이 남성들을 동질적이고 단일한 존재로 만드는가? 그리고 그 결과는 무엇인가? 나는 여기에 언어와 경로의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성들이 남성중심적 사회에서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와 자신이 잘 살아갈 수 있는 경로를 제공받지 못해서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면, 남성들은 남성중심적 사회가 자신에게 충분한 언어와 경로를 제공한다고 믿기 때문에 더 고민하지 않고 그것에 대한 애착을 놓지 않는다. 그렇게 '다른 삶'을 찾는 여성들이 늘어나고, 여전히 많은 남성은 '좋은 삶'에 매달릴 때, 그리고 연애/결혼 상대로서의 이성을 요구하는 '좋은 삶'이 그렇지 않은 '다른 삶'과 충돌할 때, 남성은 여성을 장애물로 느끼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 제대로 된 남자가 되지 못했다고 느끼는 청년 남성들이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보여주는 자기 서사나 자기 연민이 다른 소수자에 대한 폭력적인 태도로 이어지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그렇게 서로 다른 성별들이 공유할 수 있는 공통언어의 가능성이 사라져 간다. p.268


언어. 우리가 무언가 생각하려면 언어가 필요하다. 언어 없이는 어떤 구체적인 생각보다는 관념에 가까운 생각을 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럴 때 예술이 언어의 역할을 대신하기도 한다. 그래서 미술 작품이나 음악 감상을 할 때 마음이 편해지고 언어를 대신한다는 느낌이 드는 경우가 있지 않나. 그렇기 때문에 나를 다르게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드는 언어가 필요하다고 책에서 이야기한다.


제이미를 극단적으로 몰아붙이는 '인셀'과 같은 단어는 폭력적이다. 남성들을 동질적이고 단일한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남성중심적 사회가 남성에게 안 좋은 결과를 가져다준다. 짧고 강렬한 영상에 중독되어 있는 현상과 마찬가지로 중독성 있는 언어를 쓰는 문화에 푹 빠져 있다. 특히 사람과 대면해서 음성으로 전달되는 형태가 아니라 온라인상에서 직접 사람을 보지 않고 사용하기 때문에 사용 이후 영향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하기 힘들다. 사용하고 나서 즉각적인 반응이 오는 대면과 달리 비대면은 그 영향을 바로 볼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친밀성. 또래 문화가 형성되고 그 안에 소속되고 싶어 하는 것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감정이다. 그것을 부정할 순 없다. 그런데 또래 집단에 들어가지 못하고 떠돌게 된다면 다른 친밀성을 찾게 된다. 잘못된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는 모습이 '소년의 시간'에서 제이미를 통해 드러난다. 3화에서 상담사와 대화 도중 자신은 피해자를 절대 건드리지 않았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마지막까지 그녀의 존엄성을 지켜줬다는 식의 이야기인데 그것은 그저 변명일 뿐이다. 대신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없지 않은가.


가족에서도 속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없었고 그나마 있었던 친구들은 서로 루저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친밀하다기보다 그저 필요에 의해 몰려다녔다고 생각할 수 있다. 사건이 벌어진 후에도 친구라고 할 수 없는 반응을 보인다. 그래서 피해자와 친밀한 교류를 원했으나 거절당하게 되자 갈 곳을 잃은 제이미가 폭주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다른 커뮤니티가 필요했던 게 아닐까 생각해 볼 수 있다. <증명과 변명>에서 우진이 속해있던 공동체인 교회를 좀 더 현명하게 활용했다면 어땠을까 싶다. 안전한 대화만을 시도하는 자세만 용기를 가지고 벗어난다면 친밀한 관계를 형성할 가능성이 있었을 것 같아 아쉽다.


섹스중심사회에서 섹스는 가장 강력하고 근본적인 친밀성이며, 성적 매력은 가장 궁극적인 매력이다... 문제는 이처럼 이성과의 일상적인 상호작용에 별다른 문제를 겪지 않는 남성조차 자신이 여성과 섹스를 못 해봤다는 이유로 여성을 비인격적인 존재로 보기에 이르곤 한다는 점이다. 우진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듯, 이것은 여성뿐 아니라 남성 자신에게도 폭력적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아름다울 기회를 스스로 저버리고, 자신에게 아무런 매력이 없다고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도태남 인권운동가'의 요구에 따라 이들에게 섹스할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문제의 원인인 섹스중심사회에 대해서는 전혀 질문하지 않기 때문에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섹스를 중심에 두지 않는 친밀성이다. pp.68-69


제대로 긴 글이 무색하게 이야기할 내용이 많아 엉망이 된 것 같지만 그래도 계속 다양한 책을 읽으면서 다듬어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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