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번째 답장
유정님에게
깊은 여운이 남는 편지를 받으면 답장이 늦어지는 이유는 그 감동을 담기에 알맞은 그릇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겠죠? 잠들기 전이나 밥을 먹을때 문득문득 편지가 떠올라 머릿속에 답장을 굴리다보면 이미 열 번도 더 답장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그러다가 이렇게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 아직도 답장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 부리나케 키보드를 일단 두드려 보죠. 하지만 그 답장은 내가 머릿속으로 굴려보던 내용의 십분의 일도 안되는데, 이제는 그릇의 아름다움이나 품질보다는 신속함이 더 큰 미덕임을 위안삼아 마침내 전송 버튼을 누를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폭싹 속았수다는 아직 보지 못했어요. 눈물버튼이라는 주변의 후기에 날 잡고 정주행해야지 마음만 먹고있다가 마치 식재료 잔뜩 사놓고 배달음식 시켜먹듯 정작 별로 흥미없는 다른 토막영상만 보게되네요… 다음에… 다음에… 이 지연하는 습관이야말로 행복에서 멀어지게 하는 일등공신이 아닐까 싶어요.
그래서말인데 유정님과 최근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읽었잖아요. 피예르가 극복해야할 자신의 가장 주된 욕망을 “태만”이라고 하는데 그 부분을 정말 공감하며 읽었어요. 사유하는 사람이 갖는 망설임과 주저함은 태만이 되기 쉬운데 그것만큼 일상을 위험에 빠트리는 것도 없는 것 같거든요. 피예르가 포로생활 중 만난 플라톤 카라타예프가 그 태만을 극복하는 좋은 모범이 된 것 같아요. 저도 플라톤이 정말 좋아서 자기 전 이렇게 기도를 하게 됐어요. “돌처럼 자고 빵처럼 일어나게 하소서.” 그의 깊은 단순함과 순수함을 통합시키며 피예르는 오래 그를 짓누르던 태만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는 영화 로마의 클레어를 좋아하는데 피예르가 플라톤을 보며 느낀 존경심을 저는 가정부 클레어의 일상을 보며 느낀 것 같아요. 그리고 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을 읽으며 그 태만의 뒷면을 알게 됐어요.
‘사랑이라는 것은 공룡과도 같아서, 모든 세상이 그들의 죽음을 즐긴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로미오와 줄리엣, 안나 카레니나, 펜테질레아, 항상 죽음만이 있고, 항상 불가능한 것에 대한 쾌락이 있다. 사람들이 핑계로 삼는 것처럼 그렇게 사랑에 무능력하다고 나는 믿지 않는다. 사람들은 청춘의 사랑이 없는 불행한 영혼들에 의해서, 언제였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일찍 죽음의 공포 속에서 소리치면서 그들의 사랑을 몸 밖으로 내보냈던 불행한 영혼들에 의해서 그렇게 믿도록 설득을 당하는 것이었다.’
사랑에 대한 방어기제를 설명한 문장이 아닐까 싶어요. 사랑이 두렵기 때문에 회피하며 죽음에 대한 공포를 생산하는 것… 이런 학습효과의 오랜 누적으로 결국 사랑과 행복을 원하지 않게되는 것… 나아가 그 고통을 즐기는 것… 결국 태만으로 도피하는 것…
고통에 관해서는 나름의 답을 찾아가는 중이에요. 슬픈 짐승이라는 제목이 ‘모든 짐승은 교미를 끝낸 후에는 슬프다' 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는데 모든 짐승이 교미를 끝낸 후 슬픈 이유는 교미를 하며 이미 행복을 경험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도파민의 시소 원리처럼… 전쟁과 평화에서 저는 마리야가 제일 좋다고 말씀드린적이 있잖아요. 슬픔과 고통의 뒷면에는 반드시 럭키비키 행복이 있음을 이해하면 두려움보다 감사함이 생겨나는데 마리야는 이런 가치를 보여주는 인물이라서 깊은 존경심을 갖게 되거든요.
또다른 한 가지는 육체적 행복은 한계가 있을수밖에 없기에 교미 후의 짐승은 슬픈게 아닐까요. 나와 네가 하나로 결합되고자 하는것이 사랑인데 육체의 사랑은 시간과 물리법칙이 적용되는 사랑이니까요. 몸은 늙고 열정은 식고 아이는 떠나고…
그런데 육아를 하며 사랑의 좀더 깊은 면을 경험하게 됐어요. 원래 있던 나라는 사람이 소멸되고 오직 아이의 요구에만 움직이는 어찌보면 꼭두각시같은 상태인데 거기에 묘한 해방감이있거든요. 뭐라 설명하기 어렵지만 시몬 베유의 중력과 은총에 이런 구절이 있어요. 이 문장에서 깊은 위로를 받아요.
“모든 인간은 필연의 노예이지만, 그것을 자각하는 노예는 훨씬 높이 있다.”
민혜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