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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돌보는 독서

<읽지 못하는 사람의 미래>를 읽고

by 태양이야기

상황


주의침탈은 과거에는 정보가 희소 자원이었다가 정보가 넘쳐나는 오늘날 인간의 주의가 희소 자원이 되어 사람들의 주의를 가져가지 위한 경쟁으로 인해 빚어진 현상을 말한다(p.15). 신체로 직접 감지할 수 있었던 물리적 ‘주변’이 데이터화된 ‘주변’으로 바뀐 결과(p.17)라고 이야기한다. 한 마디로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전자제품이 나를 잠식하면서 과거와 다른 생활환경에 놓이게 됐다. 자연스럽게 매일 SNS를 하고 영상을 보는 행위가 반복된다. 그러면서 감각을 느낄 수 있었던 어쩌면 이 시대에 비효율적이라고 불리는 활동이 줄어들게 됐다. 그냥 가만히 영상만 봐도 즐거움과 재미를 느낄 수 있고 움직이지 않아도 먹을 걱정이 해결되니 말이다. 감각들이 자본으로 치환(p.57)되면서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되고(p.50) 쓸모없는 것처럼 느껴지게 됐다는 저자의 말이 일리가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 주의침탈을 벗어나기 위해 자본이 나서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얼마 전에 있었던 국제도서전의 사람들이나 주류박람회에 있었던 사람들을 보면 직접 보고 만지고 맛보는 즐거움을 위해 시간을 내고 있었다. 특히 젊은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띈 것이 놀라웠다. 책을 읽는 행위가 가지는 물성이나 감각을 다시 찾는 움직임이 감지됐다고 느꼈다. 마찬가지로 동네에 서점을 열고 나니 젊은 사람들이 굳이 동네 서점을 찾으러 온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글의 힘


소크라테스는 글이 가지는 가치에 대해 폄하한 사실이 유명하지만 그 당시 뇌에 대해 몰랐기 때문에 뇌의 가소성을 놓치는 오류를 범했다(p.150). 뇌의 가소성이란 뇌의 신경회로망이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따라 계속 변하는 성질을 일컫는다. 인간의 뇌는 고정돼 있지 않고 지식이나 경험이 쌓이면 변화한다고 하는데 정말 그렇다. 분명 나는 철저하게 이과형 인간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수능 언어 영역을 너무 못했기 때문이었다. 어렸을 때도 책을 좋아했지만 그 사실과 시험 점수는 별개라고 인식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진정한 문해력을 갖추지 못하고 책 읽는 행위를 좋아했던 건지 뭔가 책을 좋아했던 건지 알 수 없지만 수능 이후 어떤 삶을 살았는가에 따라 지금 더 언어영역 점수가 높은 걸 보면 뇌의 가소성은 무시할 수 없다.


진정한 문해력이란 아는 단어의 조합이 빚어내는 문장의 의미를 이해하고 심층의 숨은 뜻을 찾아내는 능력이(p.153)이라고 한다. 문해력이 필요한 이유는 사람들과 대화를 원활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다. 같은 언어를 쓰더라도 너무 다른 해석이 만들어진다. 책을 볼 때 저자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전달’ 받지 않고 읽는 사람의 생각이 ‘촉발’(p.155)될 수만 있다면 대화를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


“이 모든 능력의 발달에 촉진제 역할을 한 것은 읽는 뇌의 설계에서 핵심인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비밀스러운 선물이었다.” ‘초월적 사고를 하는 시간’이라는 이 신비한 무형적 선물이 바로 읽는 뇌가 이룩한 가장 큰 업적이다. p.158
“책을 읽는다는 것은 텍스트의 해석을 통해 자신의 기억을 해석하는 일이다” p.168
문학은 그냥 받아 모으거나 꺼내 쓰면 되는 완제품으로서의 지식을 전달하지 않는다. 완성된 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종결되지 않은 문제를 던짐으로써 스스로 답을 찾아 나서게 한다... 복잡한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진정한 지식을 얻는 길은 둘레길처럼 돌아가야 하는 긴 우회로다. 책은 그 길을 독자가 직접 찾아 나서게 한다. p.209


해결책


종착지: 돌봄의 읽기, 정보의 수동적 소비가 아니라 자신의 주의력을 능동적으로 행사함으로써 이기적 자아의 근시안을 벗어나 타자와 세계를 호기심과 애정의 눈으로 둘러보고 돌아보고 살펴보는 것이다. p.21
미셀 푸코가 말년에 고대 철학을 다시 독해하며 주목한 것도 자기 돌봄이었다. p.35
자기 돌봄은 필연적으로 타자와 세계에 대한 돌봄을 통해서만 이뤄질 수 있다. p.35
그의 일상 세계는 서로서로 돌봄에 의해 ‘완전한’ 하루가 완성된다. -퍼펙트 데이즈 p.235


자기 돌봄에 대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강조했다고 느꼈다. 세상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 손을 내밀기도 하고 손을 잡아주기도 해야 한다. 내 손이 어디에 있고 잡을 힘이 있는지 어떻게 내미는지 해봐야만 알 수 있다. 자기 돌봄이 그 시작일 수 있다. 자기 자신에게 괜찮냐고 토닥여주기도 하고 힘내라고 끌어주기도 하면서 말이다. 자기 자신을 돌볼 줄 안다면 자연스럽게 자신을 둘러싼 원이 점점 넓어진다.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 온전히 나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인식은 이때 책을 통해 더 빠르게 효과적으로 확장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계속 책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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