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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o Jun Aug 13. 2016

[동아시아면류학說]엄마의 열무,무말랭이를 넣은 비빔국수

그대, 이 오묘한 식감을 보라 

1. 낮에는 맛있는 고기를 먹었습니다. 디저트로 달콤한 것도 먹고 네스프레소 커피 클래스에서 커피도 여러 잔 마셨죠.  집에 돌아오니 입이 달달합니다. 혀 뒤쪽이 설탕으로 코팅된 기분 아시죠. 

배는 고픈 것도 같고 고프지 않은 것도 같고. 

더위는 몸의 다른 감각을 무디게 합니다. 

다리가 아픈 것도 같고. 아프지 않은 것도 같고. 밥을 먹을까 말까. 약을 먹으려면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런 날 저녁 식사로는 무엇이 좋을까요. 

단연 매콤한 국수입니다. 단 것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칼칼한 매운맛이죠. 

더위를 이기려면 차가운 국수여야 하겠습니다. 

삼시세끼 식구들처럼 '역시 여름엔 부대찌개지...'는 안될 것 같아요. 

이열치열은 할 말 없어서 우물거리다가 아무 말이나 내뱉은 그런  핑계 같다 하겠습니다. 오래전부터 그렇게 생각해 왔어요.


2. 냉장고를 엽니다. 

아무것도 없군요. 어제 엄마에게 말랑거리기 시작한 복숭아 9개를 모두 가져다 드리고, 냉장고에는 수박 피클뿐, 

아니.... 아니네. 

지난주 엄마 집에서 받아온 무말랭이와 열무가 있습니다. 비닐팩에 두 겹으로 싼 후 핸드백에 넣어 주셔서 그러려니 하고 돌아왔는데, 한 방울도 새지 않았거늘 핸드백에 반찬 냄새가 진동을 했더랬습니다. 

열무김치의 냄새 분자는 크린랩을 뚫고 나오나요?

덕분에 가죽 백 안감에 페브리즈를 2포하고 뒤집어 햇볕에 말리길 여러 날. 구증구포의 어려움을 절감하며 다시는 반찬을 핸드백에 넣지 않으리 다짐했는데 

그 문제의 열무김치와 무말랭이 녀석들이 냉장고에 있군요. 

다른 재료는 없습니다. 그 흔한 계란 한 줄도 없어요.

여름의 냉장고는 기력이 약해져서, 아니, 식재료가 기력이 약해졌나요... 아무튼 냉장고에는 공산품만 넣어둡니다. 질소 충전 따위는 했다는 뭐 그런 거요. 

물, 두유, 맥주, 올리브, 슬라이스 치즈 이런 거 말입니다. 


3. 35살 생일 선물로 스스로에게 사준 멀티 포트에 소면을 삶습니다. 

이마트 노브랜드 990원짜리 소면은 벌써 반 넘게 먹어갑니다. 

어젯밤 삼시세끼에서 차승원이 하얀 모밀이라고 나가시 소면처럼 소면을 쯔유에 말아 준비했더군요. 

메밀면이라 해도 밀가루 함량이 압도적인 것이 대부분인지라, 구차하지 않은 소면말이가 차라리 좋습니다. 

색만 낸 메밀면은 저리 가라지요. 

여름날 소면은 여러모로 쓸모 있는 녀석입니다. 


가스불을 오래 켜기 싫어 전기 포트에 물을 끓이고 포트에는 아주 적은 물만 끓입니다. 포트 안에는 기본 망이 탑재되어 있어서 망만 쏙 빼면 물은 쪼로록, 국수만 뺄 수 있는 콘셉트이라던데, 가스레인지와 싱크 사이엔 그릇들이 있어서 제겐 영 쓸모없군요. 

JAJU의 멀티 포트. 쓸모 없다 쓸모 없어 나따위에겐 가당찮은 물건.



사진 출처:  http://www.jaju.co.kr/product/productDetail?productNo=01P0000022090&brndMallCd=01&noCateProductYn=Y&dspCatNo=010000000026


세 번 찬물을 집어넣습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때부터는 5초에 한 번씩 면을 두 세 가닥 꺼내서 남은 찬물에 담갔다가 먹어봅니다. 더, 더, 더 익어해야. 

더... 하면서 면이 익었나 안 익었나 먹어보는 그 순간에 꽤 많은 양을 먹어버려요. 

이미 배가 절반쯤 부른 기분입니다. 

면은 이미 너무 불어버렸군요. 

그래 매번 이런 식이지. 여기서 즉석 면을 먹다가 이렇게 되지. 흑 


4. 망을 뽑아 면을 빱니다. 찬물에 뽀득뽀득 

더 거칠게 빨아야 하겠지만 먹느라 면이 좀 너무 익어버려서 뭉그러질까 봐 적당히 빨았습니다. 

물기를 짠 면을 유리 볼에 넣습니다. 

그다음? 그다음부터는 간단합니다. 무말랭이가 담긴 봉지를 뜯어 위에 국수 위에 올리고, 열무김치가 담긴 봉지를 뜯어 그 옆에 올리고, 동원 양반김 한 팩을 뜯어 그 옆에 올립니다. 

비빔 양념장은 국수에 빛깔만 들만큼 아주 조금만 짜 놓고, 췜기름(이렇게 발음하는 게 좋아요) 통깨를 약간 뿌립니다.  

그리고는 탄산수 한 병을 가져와서 ( 맥주는 다리 염증으로 다시 못 먹게 되었습니다.) 식탁 겸 책상 겸 선반 겸으로 쓰고 있는 탁자 앞에 앉아 잘 비벼서 먹기 시작합니다.


아무래도. 김이 포인트인 것 같습니다. 2016년 5월 13일이 유통기한이었던 올리브유에 구운 동원 양반김되시겠습니다.


5. 보아요. 이 오묘한 식감을. 

유약해진 열무김치는 팍 시어버려서 국수에 비벼먹기 좋고, 무말랭이는 특유의 꼬장꼬장함으로 버팅기고 서있습니다. 아 몰라. 모르겠다고요 난. 하는 기분으로 씹을 때마다 오도독 거립니다. 

소면은 내가 무슨 힘이 있냐... 하는 느낌으로 그들을 말고 어요. 좀 너무 삶았어. 널 너무 힘없게 만들었다. 미안. 앞으론 두 번만 건져 먹고 불을 꺼야겠어요. 

비빔장을 많이 넣지 않은 것은 잘 한 일이었어요. 간은 이미 충분합니다. 

오늘의 국수에서 느낌 이 오묘한 식감은 다른 국수에서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무말랭이. 

나는 너를 오래전부터 좋아했었지. 나는 하굣길에 교복을 입고 시장에 가서 무말랭이를 사 와서 내일 도시락 반찬으로 싸 달라고 엄마에게 건네고 했었어. 엄만 나를 이상한 아이라고 했지. 뭐 그런 무말랭이를 좋아하냐고. 

이렇게 너는 여전히 내 사랑. 


비벼놓고 나니 제법맛있다. 무말랭이 넌. 너란 녀석은. 


6. 어째서 기승전무말랭이널사랑해가 되어버렸지만 

좋은 여름 주말 저녁식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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