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신변잡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사 Sep 11. 2018

전공과 직업에 대한 소소한 오지랖

진로 고민을 하던 고 3 소녀 앞에서 핏대 세운 사연



     

프로젝트 때문에 한동안 고등학생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시절을 보내는 대부분이 그러하듯 불확실한 미래와 날카로운 불안들이 그 친구들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었다.

     

동글동글 귀여운 얼굴에 긴 생머리를 가진 고3 친구가 어느 날 불쑥 내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 대학 때 어떤 전공하셨어요?


고 3 친구가 나에게 전공을 물어본 이유는 본인을 지금 가장 괴롭히는 존재가 바로 “진로 고민”이었기 때문이다. 당장 하고 싶거나 되고 싶은 분야는 전혀 없고, 집안 사정상 최대한 빨리 졸업해서 취업을 해야 한다는 확실한 목표지점만 있었다. 주얼리 디자이너인 친언니가 이 분야가 그나마 취업이 잘된다고 해서 그쪽 전공으로 진학을 할까 고민 중이라고 했다.

     

이제 겨우 19살일 뿐인데 꿈이 아닌 돈벌이, 취업을 고민해야 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이 슬펐다. 수심 가득한 얼굴의 그 친구를 붙잡고 오지랖을 떨기 시작했다.

     

“사회에 나와서 보니까 전공 살려서 사는 사람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아. 분명 대학 교육 중요하지. 근데 대한민국 사회에서 대학 교육 내용이 실무에서 잘 활용되냐? 그 부분에 대한 내 개인적인 생각은 <물음표>야”

     

그동안 내가 느낀 현실을 그 친구에게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사회생활을 오래 해오면서 많은 사람들을 봐왔다. 전공자도 봤고, 비전공자도 봤다. 근데 전공자라고 잘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비전공자라고 못하냐? 그것도 아니다. 사실 내가 일 잘한다고 느낀 신입 친구들은 대부분 비전공자였다. 왜냐? 어설프게 아는 사람이 제일 무섭다. 오만이라는 그 견고한 벽을 그 누구도 깰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세상을 가장 신랄하게 비판할 수 있는 시기는 아마 대학 3~4학년 때쯤이 아닐까? 영화학도라면 봉준호도 까고, 박찬욱도 하찮다. 언론, 방송계를 희망하는 학생들이라면 손석희가 우습고, 나영석도 유치하다. 광고계 장악을 꿈꾼다면 한국 최초 세계 5대 광고제 휩쓴 박서원도 그저 운 좋은 재벌 3세 금수저일 뿐이다.

     

냉철한 병아리 평론가들이 현실과 마주하면 곧 패닉에 빠진다. 보통 세상에 갓 나온 어리바리 신입에게 주어지는 일은 프린트, 회의 준비, 커피 주문하기 같은 단순 노동뿐이다. 이제 막 입사한 병아리가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히어로가 되어 박수받는 일은 드라마 속에서나 가능하다. 자신이 알던 얕은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살아왔는데, 실전은 너무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자신의 무시무시한 천재성으로 거장들을 단숨에 뛰어넘을 수 있을 거라는 오만이 깨져 버린다.

     

반면 비전공자들은 현실을 빨리 알아차린다. 비전공자라는 태생적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0의 상태“에서 모든 일에 임한다. 여기서 <0의 상태>란 제로 베이스를 말한다. 일명 ‘쿠세’, ‘쪼’라 불리는 버릇이 생기기 전인 무결한 상태를 뜻한다. 모르기 때문에 ”왜? “라는 질문 대신 이 바닥의 습성을 스펀지처럼 쭉쭉 빨아들인다.  

     

물론 전공자 중에도 잘하는 사람이 있고, 비전공자 중에도 못하는 사람이 있다. 전공자라고 빨리 목표점에 도달하는 것도 아니고, 비전공자라고 불리한 점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사람 by 사람이고 직종 by 직종, 상황 by 상황, 회사 by 회사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하나다. 전공은 거들뿐, 결국은 ‘이 일’을 하고 싶은가? ‘이 직종‘이 나의 성향과 잘 맞는가?를 스스로 냉정하게 판단하는 것이다.  

     

기차나 전철 처럼 정해진 선로로만 갈 수 없기에 짜릿한(?) 게 사람의 인생아닐까?  


매해 날고 기는 스펙으로 중무장한 인턴들이 온다. 요즘 같은 시대에 그들은 무시무시한 경쟁률을 뚫고 살아남은 대단한 존재들이다. 인턴들이 와서 하는 처음 일은 대부분 늦은 밤 시사를 앞두고 선배들이 배가 고파 예민해지기 전에 센스 있게 야식을 주문하고, 영수증을 챙기고, 촬영용 소품을 나른다. 밤낮 없는 스케줄에 출근 첫날 반짝이던 눈은 채 3일이 되기도 전에 생기를 잃는다. 드라마 <프로듀사>, <그들이 사는 세상> 속 피디와 작가의 모습과 현실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보통 일주일 전후를 고비로 남을 사람은 남지만 떠날 사람은 떠난다. 방송사 쪽으로 소변도 보지 않겠다는 뼈 있는 농담을 유언처럼 남긴 인턴들이 무수히 많다. (다들 잘 살고 있지?)

     

혼자서 혹은 고만고만한 지망생들끼리 스터디란 이름으로 모여 망상을 나누는 경우를 많이 봐왔다. 요리사 지망생들이 모여 “돌도끼로 고기 썰어야 미네랄이 더 해져 영양이 풍부해진다 “처럼 필드에서는 결코 쓰지 않는 장비와 말도 안 되는 이론을 열심히 분석하고 고민하기도 한다. 그럴 때면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라고 오지랖을 떨고 싶어 진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랬다가는 미친 꼰대 소리 들을 테니 조용히 이렇게 장황한 글을 쓴다.

     


동글동글 귀여운 얼굴에 긴 생머리를 가진 고3 친구에게 말했다. 요즘 같은 시대에 평생 직업이란 없다. 언제 어느 때 직업이란 바뀔 수 있다. 다만 사람의 성향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 해야 할 것은 ① 본인의 성향을 파악할 것 ② 흥미 있는 분야가 무엇인지 찾을 것 ③ 그 분야에서 필요로 하는 능력이 무엇인지 찾아 노력할 것! 말로는 간단하지만 실천은 어려운 숙제를 소녀에게 건넸다. 내 말을 다 들은 소녀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긍정의 미소인지, 부정의 미소인지 그 진실은 오직 소녀만이 알 것이다.

     

내 인생에 다시 그 소녀를 만날 일이 있을까 싶다. 나는 소녀의 인생 중 무수히 지나치는 존재감 없는 엑스트라 중 하나일 것이다. 언젠가 이름을 잊을 테고, 언젠가 얼굴이 흐릿해지고, 결국 끝에는 어떤 사람인지 기억도 안 날 존재일 것이다. 하지만 그거 하나만큼은 잊지 않길 바란다. 뜨거웠던 고 3 여름, 오지라퍼 하나가 핏대 올리며 외쳤던 “네가 뭘 좋아하는지부터 찾아봐”라는 말! 그 거 하나만 기억해주면 나는 여한이 없다.  사실 그 말은 내가 딱 소녀만 한 때 듣고 싶었던 말이고, 필요했던 말이다. 나처럼 혼자 괴로워하고 아파하고 방황하지 않길 바라는 오지랖 충만한 잔소리다.  지금은 축축하고 어두운 동굴을 걷는 기분일 것이다. 하지만  그 시절을 지나면 분명 햇살 가득한 꽃길은 아니어도 바람 솔솔 불어서 걷기 수월한 길이 언젠가 나올 것이다.  


그날을 위해 지치지 말고 힘!

     

     


매거진의 이전글 곱창 좋아하세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