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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Oct 17. 2019

나는 어쩌다 ‘쓰는 인간’이 되었나?

스마트폰과는 다른 스마트한 인간이 되기 위한 선택



늦은 오후의 한적한 산책길이었다. 맞은편에서 신나게 달려오던 자전거 한 대가 자그마한 턱에서 삐끗하더니 땅에 고꾸라졌다. 약 10m 앞에 자전거와 함께 내동댕이쳐진 사람은 이제 막 초등학교 4~5학년쯤 되는 남자아이였다. 금세 툭툭 털고 일어날 거라는 나의 예상과 달리 한참 몸을 웅크리고 신음하고 있었다. 그제야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얼른 소년에게 달려갔다.


괜찮아? 일어날 수 있겠어?
아~~ 아~~


소년은 다리를 부여잡고 신음소리만 내고 있었다. 얼른 바지 밑단을 걷어 올려 다리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피는 나지 않았고, 상처도 없다. 외관상으로는 크게 문제가 있어 보이진 않았다. 의료 지식이 전무한 나는 우선 피가 나지 않는다는 것에 안도했다.


보통 그 또래의 소년들이 그러하듯 성인용 자전거에 몸을 싣고 속도를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내달렸다. 그 속도 그대로 맨몸이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으니 충격이 고스란히 몸 안에 남아 있을 터였다. 소년을 부축해 한적한 길 한쪽으로 몸을 옮긴 후, 소년에게 물었다.


괜찮아? 내가 볼 때 피도 안 나고 다리를 움직일 수는 있으니
크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 봐.

근데 집에 갈 수 있겠어? 집은 어디야?

저 뒤 ◯◯◯아파트 *단지요.

못 걷겠으면 부모님께 전화해야지.

핸드폰 없어요.

그럼 내가 걸어줄게 부모님 전화번호 뭐야?

전화번호... 몰라요.


소년의 답변에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소년이 사고의 충격 때문에 잠시 기억을 잃어버린 건가? 드라마적인 양념이 가미된 상상을 잠깐, 아주 잠깐 했다. 그런데 사정을 들어 보니 의외로 간단했다. 원래는 스마트폰이 있었는데 많이 써서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는 스마트폰이 없이 지내는 걸로 부모님과 약속했다고 한다.


스마트폰이 없으니 소년은 부모님의 전화번호를 기억하지 못했다. 어릴 때, 자식이 미아(迷兒)가 될 것을 걱정한 부모님은 늘 엄마, 아빠의 성함과 집 전화번호를 달달 외우도록 교육하셨다. 그래서 다른 건 몰라도 집 전화번호쯤은 기억하는 게 당연한 세대에게 21세기 소년의 답변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생각해 보니 나도 기억하는 전화번호는 (내 전화번호를 제외하면) 엄마의 휴대폰 번호 딱 한 개뿐이다. 부모님의 교육이 없었다면 나도 굳이 기억하지 않았을 번호다. 늘 손에는 스마트폰이 있는 게 당연했고, 연락처 목록을 누르면 수 백, 수 천 개의 전화번호가 쏟아져 나온다. 새 휴대폰을 사도 동기화를 하면 사용하던 휴대폰의 전화번호는 물론, 주고받은 메시지까지 그대로 새 폰에 옮겨진다. 어느새 전화번호를 기억한다는 것 자체가 쓸모없는 일처럼 여겨지는 세상이 됐다. 전화번호뿐만 아니다. 스마트폰은 나 대신 내가 기억해야 할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기념일은 캘린더가, 소중한 추억은 사진첩이, 하루 움직인 거리는 걷기 어플이, 내가 검색한 단어들은 포털 사이트의 검색 기록이 시간, 날짜까지 더해져 세심하게 다 기억되고 있다.


스마트폰 덕분에 생활은 스마트 해졌겠지만 정작 내 머리는 점점 스마트함과는 거리가 멀어져 갔다. 스마트폰이 사라지면 난 기념일도, 추억도, 관심사도 어느 하나 기억하지 못한다. 어쩌면 사소하고, 또 어쩌면 소중한 ‘기억’이라는 일을 스마트폰이 전담하고 있다. 인간의 뇌는 분명 용량이 정해져 있을 테니, 그럼 내 뇌는 그만큼 할 일이 줄어든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렇다면 분명 내 머릿속은 보다 여유롭고, 보다 의미 있는 것들을 해야 한다. 단순 기억은 스마트폰이 담당하고 있으니 난 기계와는 다른 좀 더 가치 있는 뇌 활동을 하고 있을까?


부끄럽게도 정작 내 머리가 하고 있는 일은 ‘오늘 뭐 먹지?‘ ’ 졸린데 사무실에서 어떻게 티 안 내고 졸지?‘처럼 한없이 단순한 것들뿐이다. 날이 갈수록 하고 싶은 말은 머릿속에서 이미지로만 빙빙 돌고 정작 단어와 문장이 되어 입 밖으로 튀어나오기까지 꽤 오래 입안에서 맴돌았다. 아끼다 제대로 뚜껑도 열어보지 못하고 사용 기한이 지나 버린 화장품처럼 사용감 없는 뇌가 유통기한이 가까워져 오는 느낌이었다.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머리는 굳어져가고 몸은 본능에 지배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더 글쓰기에 매달리고 있다. 일이야 이제 연차가 쌓여 관성적으로 하는 것이고, 뇌를 풀가동해 내 생각을 글로 쓰며 뇌에 채찍질을 하는 중이다. 뇌야 너도 할 일을 하라고. 생각이 나는 대로 글감을 메모해 두고, 하루에 2~3시간은 무조건 앉아 글을 쓴다. 메모장 속 단어들이 한 편의 글이 되도록 잡고 팬다. 누구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나 인정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나를 위해. 머릿속 생각을 꺼내 글로 옮기는 중이다.


그렇게 적지 않은 시간이 쌓이니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새하얀 빈 벽에 대고 말하는 것 같던 날들을 지나고 나니 조회수, 좋아요, 구독자의 숫자들이 늘어났다. 내 글을 읽어주고 공감해 주고 응원해 주는 사람들의 존재가 느껴졌다. 그들의 응원이 동력이 되어 더 가열 차게 쓰고 있다.


'글쓰기’가 내 삶에 들어온 후 난 좀 ’예민한 사람’이 됐다. ‘까칠하고 신경질적이다 ‘라는 말이 아니다. 큰 것이 주는 감동만을 찾아다녔던 내가 사소한 것에도 크게 감동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주변의 자극들을 세심하게 들여다보는 관찰력, 그 자극이 글감이 되어 한 편의 글로 완성해내는 지구력, 악플을 적당히 넘기는 스킵 능력까지... 필요성을 몰랐던 여러 힘들을 글쓰기를 통해 내 몸에 장착하고 있는 중이다.


무엇보다 가장 큰 수확은 머릿속에서 휘발되었을 생각을 글로 공식화하면서 내뱉은 그 글을 책임지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는 점이다. <‘걷기’의 좋은 점>에 대해 구구절절 글로 썼으니 걷기를 게을리할 수가 없다. 또 <부모님과의 여행이 주는 기쁨>을 찬양했으니 부모님과 떠날 다음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지금도 이렇게 글쓰기의 즐거움에 대해 장황하게 얘기하고 있으니 분명 ‘쓰는 인간’으로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 이렇게 ‘쓰는 인간’이 되기 전보다 나는 분명 한층 스마트해졌다.


뭘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오늘도 남들의 글을 유랑하며 주저하고 있는 '쓰는 인간 꿈나무'에게 말하고 싶다.


우선, 시작해 보세요.
시작하면 그다음은 훨씬 쉬워요.
'오늘의 나'보다 '내일의 나'가 분명 잘 해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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