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마일리지 싸움
시장에 있는 엄마의 단골 정육점을 자연스레 따라다녔다. 그곳은 엄마와 동년배인 어머니 사장님이 30년 넘게 지켜온 가게였다. 하지만 몇 해 전 자녀분이 가게를 물려받으면서 묘한 변화가 느껴졌다. 고기의 질도, 값도, 응대도 예전 같지 않았다. 물가는 오르고, 경쟁은 치열하고, 손님은 줄어드니 이해는 갔지만 입안에 남는 아쉬움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 후 나는 인터넷 정육점, 대형마트, 산지직송 전문점, 동네 정육점을 유랑했다. 그러다 시장 구석에 새로 생긴 정육점이 눈에 들어왔다. 젊은 부부가 야심 차게 개업한 가게. 깔끔한 인테리어, 정돈된 진열, 합리적인 가격, 친근한 응대, 세심한 서비스... 이 집은 뭔가 다를 것 같았다.
첫날, 테스트 차원에서 삼겹살 한 근을 사고 계산을 마치자 사장님이 영수증과 함께 쿠폰을 내밀었다.
“1만 원당 쿠폰 1장 드려요. 쿠폰 20장 모으시면 소불고기, 25장은 삼겹살, 30장은 한우 국거리 드립니다.”
쿠폰을 받으며 생각했다. ‘이걸 언제 다 채우겠어?’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반납은 못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미소를 짓고 있는 귀여운 돼지 그림이 박힌 쿠폰이 나를 설레게 했다. 그날 사간 삼겹살은 맛있었고, 나는 오랜 정육점 방황을 끝내고 정착하기로 마음먹었다.
‘마케팅용 쿠폰‘이라는 사장님이 던진 미끼를 덥석 물어버린 나는 일주일에 한두 번, 꾸준히 그 가게에 갔다. 찌개용 앞다릿살, 육회용 우둔살, 육전용 홍두깨살, 찜용 갈비… 종류는 다르지만, 살 때마다 지갑에는 쿠폰이 차곡차곡 쌓였다. 어느 날, 묵직해진 지갑을 열어보니 쿠폰만 18장, 머지않아 삼겹살 한 근이 눈앞이었다. 나는 그저 단백질을 섭취했을 뿐인데, 이토록 충실한 ‘적립의 기쁨’을 누리고 있었다.
“포인트 적립하시겠어요?”
“쿠폰에 도장 찍어드릴까요?”
카페나 상점, 음식점에서 듣는 익숙한 문장이지만, 요즘은 유난히 마음에 남는다. 예전엔 쿠폰을 준다고 해도 마다했는데 이제는 믿을만한 곳에 도장을 쌓는 게 편하다. 새로움을 좇던 호기심보다, 꾸준히 쌓이는 익숙함의 무게가 더 든든하게 느껴진다.
생각해 보면 러닝도 그렇다. 카드나 항공사의 마일리지처럼 누적된 시간이 결과를 만든다. 처음엔 잠깐 해보려던 게 어느새 러닝에 젖어들었다. 달리기가 세상에서 제일 싫었던 사람이 어느새 뛰지 않으면 몸이 근질거리는 사람이 됐다. 5개월 전만 해도 1km만 뛰어도 숨이 턱 막혔는데, 이젠 10km는 거뜬하다. 어느새 매 달 누적 200km도 채웠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저 하루하루 나 자신에게 도장을 찍듯 달렸다. 오늘은 조금 힘들었지만, 그래도 뛰었다는 기록. 달리기 기록 어플에 남는 그 숫자가 내 러닝 쿠폰이었다. 침대에 누워도 한 시간, 달려도 한 시간. 시간의 흐름은 같지만, 결과는 다르다. 하나는 근육을 녹이고, 하나는 자신감을 쌓는다. 하루의 피로가 녹아 사라지는 그 시간, 나는 ‘꾸준함’을 내 안의 계좌에 적립한다.
사람들은 결과만 본다. 완성된 몸, 채워진 도장, 이루어낸 목표를 본다. 하지만 그 뒤엔 텅 빈칸을 채워온 시간들이 있다. 지루하고, 느리고, 가끔은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시간들. 그 시간을 버티고 쌓을 줄 아는 사람만이 결국 ‘적립의 기쁨’을 품에 안는다. 쿠폰 24장은 종이일 뿐이지만, 25장을 모으면 삼겹살 한 근이 되는 것처럼.
내 하루의 작은 노력도 언젠가 삼겹살 한 근만큼 기쁜 결과로 돌아올 거라 믿는다. 꾸준히 쌓은 마일리지로 공짜 비행기 티켓을 얻는 것처럼 예정된 기쁨이 나를 기다린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도장을 찍듯, 나를 조금 더 채워 넣는다. 작지만 꾸준히, 그렇게 나를 적립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