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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신변잡기

복권도 아닌데 난 왜 이리 자주 긁힐까?

습관성 긁힘 증후군 극복기

by 호사


5년 전, 사과폰을 사서 계속 쓰고 있다. 화질도, 음질도 최신폰만큼 선명하지 않지만, 큰 불편은 없다. 다만 딱 하나, 배터리만 빼고. 대충 찍은 사진도 흐릿함마저 정겹고, 전화만 잘 되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럼에도 매년 신제품이 나올 때쯤이면 어김없이 스펙을 검색한다. ‘이번엔 뭐가 달라졌나?’ 가볍게 둘러보다가 한 단어에서 스크롤을 멈췄다.


긁힘 방지 강화


전면에 ‘세라믹 쉴드 2’가 적용돼 스크래치에 3배 강해졌단다. 보호필름 없이도 선명함을 유지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설명을 읽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기능, 사람 마음에도 탑재되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잘 긁힌다. 별 뜻 없다는 걸 알면서도 긁힌다. “미혼은 나라의 미래도 외면하고 지들 하고 싶은 대로만 사는 이기적인 사람들이야”라는 말에 긁히고, “영포티라며? 젊은 척하느라 힘들겠다”라는 농담에도 긁힌다. “이런 책 나도 쓰겠다”는 댓글에 긁히고, “요즘 러닝이 유행이라고 개나 소나 다 러너래” 같은 말에도 긁힌다. 이쯤 되면 애초에 긁어서 당첨 여부를 확인하는 스크래치형 복권으로 태어나야 했나 싶다. 긁는 사람도 설레게 하고, 긁히는 나도 의미가 있을 테니까. 안타깝게도 나는 복권이 아니라 인간으로 태어났고, 이 성격을 안고 평생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본다.


‘왜 나는 이렇게 잘 긁힐까?’


‘긁힌다‘는 건 사실 화가 났다는 뜻보다 당혹스럽다는 의미에 가깝다. 깊게 베인 상처가 아니라 움직일 때마다 살짝 쓰라린 정도? 대부분의 긁힘은 상처보다 ‘수치심’에서 온다. ‘나는 이 말에 왜 이렇게 흔들릴까?’ 하는 스스로에 대한 실망, 인정받고 싶은 마음, 남들 눈에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은 욕심, 그 마음이 얇아서 잘 찢어지는 거다.


예전엔 이런 성격이 너무 싫었다. 강철 멘털을 가진 사람처럼 되고 싶었다. 아무 말에도 꿈쩍하지 않는 사람. 그런데 살아보니 그런 사람은 없었다. 다만 긁혔을 때 덧내지 않는 법을 아는 사람이 있고, 긁히자마자 피가 나도록 파헤치는 사람이 있는 것뿐이었다. 슬프게도 나는 후자였다.

그래서 방향을 바꿨다. 긁히지 않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긁혀도 금방 회복되는 사람이 되기로. 그때부터 작은 실험을 했다. 남의 시선을 잠시 꺼두고 나라는 사람을 손에 들어 올려 자세히 바라보기. 내가 좋아하는 걸 남들의 기준에 맞춰 재단하지 않기. “그건 네 생각이고. 내 생각은 달라.”라고 속으로 말해보기. 운동을 하고, 숨이 차오르도록 달리고, 글을 쓰며 감정의 먼지를 털어내기.


그렇게 조금씩 달라졌다. 숨 쉬듯 긁히기는 여전하지만 이전처럼 곪지는 않는다. 상처는 생기지만 금방 아문다. 예전에는 말 한마디에 며칠을 끙끙거렸다면 지금은 하루 정도면 괜찮아진다. 마음 어딘가에 얇은 보호필름 하나 정도는 생긴 셈이다.


그리고 알게 됐다. 사람에게 필요한 건 ‘긁힘 방지 기능’이 아니라, ‘긁혀도 다시 반들반들해지는 회복력’이라는 걸. 나는 아마 앞으로도 자주 긁힐 거다. 그러나 이제는 괜찮다. 긁히는 건 살아 있다는 증거니까. 예민하다는 말도 유리멘털이라는 말도 더 이상 나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말할 생각이다.


“나는 긁혀도 곧 회복하는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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