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너를 위하여 [번외편]
아내가 떠나고 홀로 식사를 한다. 요리에는 도통 소질이 없어 밖에서 끼니를 때울 때가 많다. 자주 찾는 밥집이 있다. 하숙생처럼 드나드니 따로 주문하지 않아도 알아서 내어 주신다. 오늘도 건네는 지폐 몇 장이 민망할 만큼 푸짐한 밥상을 받아들고는 감사히 한 술을 뜬다. 연고 없는 내가 어디서 이런 집밥을 만나 볼 수 있을까. 새삼스레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잠시도 쉬지를 못하고 분주하게 움직인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고난 뒤, 그제야 숨을 돌리는데. 안색이 어두워 아픈 것은 아닌지 물으려는 찰나, 아니나 다를까 찬장에서 소주를 꺼낸다. 당신의 약이다. 누가 볼 새라 뒤돌아 한 잔을 꺾는다. 세월을 맞아 축 처진 눈가에 촉촉이 물기가 돈다.
오가며 듣기로 그녀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남편까지 급히 보내고는 홀로 아이 넷을 억척스레 키웠다. 그렇게 꽃다운 여자는 백발의 노파가 되어 여전히 시장통에서 국수를 말고 있다. 입으로는 다들 장성하여 잘 살고 있다 자랑을 하지만… 안다, 그 말이 소원인 것을. 사실이었다면 죽도록 아픈 날에는 쉬어야지요. 하루가 멀다 하고 사고를 치는 자식들 때문에, 닳아버린 무릎을 부여잡고 새벽마다 첫차에 오르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작은 가게라 해도 두고 일하는 사람이 없어 할 일이 많다. 이른 아침부터 죽을 쑤고 찬을 만들고 육수를 내고. 몰아치는 점심 손님을 받고 나면 설거지가 산처럼 쌓인다. 한 보따리 해치우고 앉아 늦은 점심을 먹을라치면 꼭, 손님이 든다. 장사를 정리하고 집에 들면 자정이 코앞이다. 그 좋아하는 연속극은 꿈도 못 꾸고 씻는 대로 고단에 빠진다. 한 달에 이틀을 빼고 꼬박 그리 산다.
가난을 노력하지 않은 자의 산물이라 함부로 떠드는 사람들은 겪어 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들은 야생을 모른다. 주어진 배양토에 양질의 종자를 심고서는 어디서 농사의 본질을 논하는가. 심어도 나지 않을 척박한 땅에서 썩은 씨앗으로 경작하는 목숨들이 부지기수다. 아등바등 살아도 형벌 같은 하루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도대체 무슨 짓들인지… 남은 소주를 같이 들고 싶었다.
“노가다야. 여자가 하는 노가다지. 누가 막일을 평생 하려 들겠어, 다들 힘 좋을 때 바짝 벌고는 손을 떼는데. 나도 그랬어. 아이들 공부 끝날 때까지만 고생하면 되겠지,라며 시작한 거야. 졸업시키고 나니 시집보내야 해. 애 키우는 데 어렵다니 보태줘야 해. 빌어먹을, 무자식이 상팔자라니까.”
말하는 도중, 먼 곳에 사는 큰 딸에게서 전화가 온다. 휴대전화 너머 어린 손녀의 목소리가 나의 귀까지 닿는다. 방금까지 자식들 흉본 사람 어디 갔나요. 감출 수 없는 반가움에 어르신의 얼굴이 활짝 피어난다.
image_©Dorothy Boh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