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책을 고르는데, 누군가 아는 체를 한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나와의 관계를 증명하기 위해 에피소드 몇 개를 실감 나게 늘어놓는다.
“아~”
알겠다는 추임새를 넣자, 무척이나 반가워한다. 멀리 있던 딸아이를 불러 소개를 시킨다. 묻지도 않은 근황을 쏟아낸다. 급한 전화가 걸려오지 않았다면, 그 집 저녁 식탁에 앉을 뻔했다.
사실 글을 쓰는 지금까지 그가 어떤 이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주치의의 말대로 무의식에 매장시킨 것이든, 파괴된 뇌세포와 함께 휘발된 것이든. 분명 기억의 일부가 사라졌다. 과잉기억 증후군이 의심될 정도로 전부를 떠안고 살던 나였는데. 망각은 신이 주신 최고의 선물이다. 덕분에 요즘은 악몽도 꾸지 않고, 환청도 듣지 않는다.
다만, 도서관에서의 일을 떠올리며. 행여 잊지 말아야 할 사람을 뇌리에서 지워버린 것은 아닌지. 퇴근길 석양을 볼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먹먹해지는 까닭은 그 때문이었을까.
고독이라 여겼던 감정이 실은 상실감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잠시 당황하다, 이내 안도한다. 어쩌면 나에게도 마음이란 것이.
그대여. 혹시라도 내가 당신을 알아보지 못한다면, 다가와 손바닥 위에 지그시 적어주오.
‘안녕’
하지 못한 작별 인사를, 답지 않은 재회에서 나눈다 하여도. 언제나 악역이었던 이 사람, 끝내 용서해 주기를.
image_©Owen G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