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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회

by 성냥팔이 소년


시작은 낡은 쪽지였다. 책장을 정리하다 우연히 발견한 쪽지 한 장. 거기에는 「이천이십오년 00월 00일 일곱 시, ㅁ카페에서」라고 적혀 있었다. ㅁ카페는 20대 후반에 자주 드나들던 곳이었다. 지금은 찾지 않는 곳. 이외에는 쓴 것이 없었다. 만날 대상이라던가, 언제 적은 것인지, 어떤 연유로 그 장소를 끄집어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과거의 나는 자신의 뇌가 이토록 망가지리라 예측하지 못한 것 같다.


한 해가 지나고 그날이 되었다.


일곱 시가 아침은 아닐까 추측해 보았지만, 기억에 카페는 정오쯤 문을 열었다. 인적이 드문 곳이라 세월에 쓸려 폐업을 했을지도 몰랐다. 일부러 정보를 찾지 않았다.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업무를 끝내고 ㅁ카페로 향했다. 나를 기다리는 오래된 미래가 무엇일까. 괜한 짓인 줄 알면서도 막연히 드는 어떤 기대들이 영혼을 이끌었다.


차에서 내려 골목 어귀에 도착했다. 거리의 틀은 그대로였지만, 채워진 상점들은 대부분 새로웠다. 불길한 예감과 달리 길 끝에 자리한 카페는 여전한 모습이었다. 늦가을이면 늘어지게 몸을 파묻고 책을 읽던 테라스. 나무로 만든 빨간 우편함까지.


호흡을 크게 내쉬고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평일이라 그런지 손님은 나뿐이었다. 애정하는 Miles Davis의 트럼펫 연주가 시간 여행자를 반긴다.


주문하는 곳으로 다가가 메뉴를 뒤적였다. 점원은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아는 체했다.


“정말 오랜만에 오셨네요.”


“아… 네.”


“캐모마일 차로 드릴까요?”


강산이 변할 만큼의 시간이 지났는데도, 스쳐간 타인의 취향을 기억하는 그녀가 무척이나 놀라웠다.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계산을 끝내고 카페 안을 살폈다. 쌓인 책들이 늘어난 것 말고는 예전과 같았다. 버릇처럼 구석진 창가에 앉았다. 벽면에 걸린 괘종시계를 바라보았다. 여섯 시 오십 분. 십 분 뒤, 나는 어떤 이와 조우할 것인가. 그러나 창밖에는 지나는 사람이 없었다. 풍경만 가득했다. 푸른 저녁의 틈 사이로 붉게 번지는 노을. 지붕에 걸터앉은 늙은 해가 몹시 고단해 보였다.


책을 꺼내 읽으려는 찰나, 주문한 차가 테이블 위에 놓인다.


“가져가라고 부르셔도 되는데.”


“한가하니 괜찮습니다.”


돌아서는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저랑 같이 왔던 일행도 기억하시나요?”


“아니요, 매번 혼자 오셨어요.”


그랬다. 이곳은 나만의 아지트였다. 홀로 책을 읽고, 사색을 하다 떠났다. 그때의 나라면 여기서 만남을 기약했을 리가 없었다. 일곱 시 반. 예정된 시간이 훌쩍 지났지만,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다. 당연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 석연치 않은 수수께끼가 고집스레 발길을 붙잡았다. 한참 더 책을 읽으며 기다렸다. 예상대로 반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문 닫을 준비를 하는 것 같아 서둘러 외투를 들고 일어났다.


“또 오세요.”


“알아봐 주셔서 고마웠어요.”


“아픈 곳은 괜찮으세요?”


“저희가 알고 지낸 사이였나요.”


“예전에 계시던 사장님이랑 친하셨잖아요.”


그녀의 말에 봉인된 기억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울컥이는 가슴이 유리 조각에 베인 듯 욱신거렸다. 내가 이곳을 찾지 않았던 까닭. 연관된 무엇도 떠올리지 못했던 이유. 온몸에 힘이 풀려 비틀거리자, 점원은 놀란 눈으로 나를 붙잡았다. 그제야 고등학생이었던 앳된 얼굴이 내 앞의 여자와 겹쳐진다. 쪽지는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열쇠였다. 묻어두었어야 할 약속. 오늘을 가리키던 날짜는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을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랬다. 이곳은 우리의 공간이었다. 함께 책을 읽고, 글을 썼다. 마주 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난생 처음 웃는 법을 배웠었는데. 잘라낸 듯, 한 사람을 완전히 잊어버릴 수 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걱정하는 얼굴을 뒤로한 채 카페를 나섰다. 돌아오는 내내, 눌러두었던 시절이 앞을 가렸다. 산 자에게나 죽은 자에게나 비겁한 인생이란…


「그대가 떠나고 십 년이 지났습니다. 살아달라더니, 살아남았더니, 결국 혼자가 되었습니다. 당신의 부재는 여전히 믿기지를 않고, 나의 삶은 언제나 연극 같습니다. 오늘 밤은 꿈속에서라도, 살기 위해 지워버렸던 그대를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끝내 잠들지 못하겠지만.」




3-5.©Andrzej Wroblewski.JPG

image_©Andrzej Wroblews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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