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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케빈 Mar 10. 2018

펜스 룰을 하기로 했습니다.

극단적인 기사 속이 아닌, 당신의 친구 준호의 '펜스 룰'

준호는 최근 '미투 운동'에 대해서 큰 지지를 보내는 한편, 알 수 없는 이물감을 느껴야 했다. 성 범죄 피해자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고, 성 범죄에 대해서 더욱 강하게 공론화한다는 운동의 취지는 분명 좋다고 생각했다. 이에 더해 성 범죄의 처벌 강화와 피해자가 사회적 분위기를 보지 않고 쉽게 신고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이물감은 무엇일까? 여성계와 정치계를 포함하여 언론까지 이 '미투 운동'을 성전쟁으로 묘사·발언하며, 남성인 자신이 '미투 운동'을 지지할 수 있는 지에 대해 갑작스런 죄의식을 느꼈다.


추미애 의원 "대한민국 남성 중에 떳떳한 사람 몇 없을 걸?"

http://news.heraldcorp.com/view.php?ud=20180308000524


한국여성단체연합 "너희의 시대는 갔다. 우리는 너희들의 세계를 부술 것!"

http://khnews.kheraldm.com/view.php?ud=20180306000508&md=20180309003506_BL&kr=1


한국노동조합 "여성이 희망이고, 노동이 미래다."

http://www.labor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50180


함께 이 시대를 살고 있던, 87년생 준호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발언들이다. 엄마, 누나의 힘듦과 아픔을 함께 고민하고, 여성의 억압들을 직접 눈으로 보고 분노하며 타파하리라 실천을 보탰던 세대다. 또한 당장의 캄캄한 미래에 '비혼'을 생각하던 N포 세대다. 하지만, 지금 언론에서 다루어지는 사회에서의 87년생 준호는 단순히 성범죄에 떳떳하지 않고, 희망도 없을 뿐더러, 스스로 만들지도 않았던 남성 위주의 사회관을 부슨다는 으름장에 어리둥절해야만 하는 위치가 되어버렸다. "남자들이 이렇게 더러워."라는 지인의 말에 준호는 마치 스스로가 가해자가 된 것인 양 침묵해야 했다. 이것이 현대판 연대 책임이란 말인가?



'미투 운동'을 바라보는 2030 무혐의자 준호의 시선

벌벌 떨고 있을, 혹은 '예전에는 그랬어'라는 꼰대 사상이 여전한 분들이 아닌, 87년생 남성, 준호의 시선으로 이 운동을 쳐다보자. 준호 자신은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는 떳떳한 무혐의자다. 미투를 지지하고, 가해자에게 비판을 하지만 성범죄와는 무관한 삶을 살았기에, 제일 감정 이입이 되는 사람은 '무고를 당한 남성'이다. 스스로와 가장 맞닿아 있으면서 이 운동이 자신에게 가장 크게 미칠 수 있는 이야기. 내가 신고 당할까 무서움을 느끼는 가해자가 아닌 '누가 악의적으로 나를 신고하면 어떻게 하지'라는 것을 걱정하는 세대. 그렇게 자신에게 피해가 오지 않도록 '펜스 룰'이라는 최후의 수단을 꺼내들게 된 준호는 사실 자신도 모르게 '펜스 룰'이라는 것을 실천해왔다.


가짜 대자보 붙여, 교수 자살로 이끈 제자 실형

http://www.knn.co.kr/163721


김어준 성폭행 폭로글 '장난으로 올렸다'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012160894&code=61121111&cp=nv


준호가 '펜스 룰'을 해왔던 것은 꽤나 오래 전부터다. "남성은 지하철을 탈 때 팔을 X자로 하고 타주세요"라는 극단적인 인터넷 글이 나오기도 훨씬 전부터였다. 오르막 계단에서 앞에 여자가 가면, 일부로 재빠르게 앞으로 치고 나간다거나, 골목길에서 앞에 여자가 가면, 휴대폰 통화를 한다거나, 일부로 다른 길로 가는 등의 행동 말이다. '불안해 하는 여성들을 배려'한다는 차원도 컸지만, 곱씹어 보니 '성범죄자 취급 받는 것이 싫어서'도 꽤 있었다. 만원 지하철에서 여성 옆에 서는 것을 두려워했으며, 직장에서조차 말과 행동을 조심했다.

준호는 지금까지 해왔던 것보다 강도를 살짝만 올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회사 분위기를 올리기 위해 시덥잖은 농담을 여직원과 주고받았던 것도, 친하다고 생각했던 이성 친구에게 웃으며 살짝 기댔던 버릇들도 더욱 조심하기로 했다.



2030의 남성의 '펜스 룰'에 대해 전혀 공감하지 않으려는 사회

준호는 '펜스 룰'에 대해서 다짐하는 한편, 펜스 룰에 대해서 언급하는 부정적인 기사들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조차 여성을 사회적으로 고립시킨다는 주장과 더불어, '성추행 하지 말라니까, 펜스 룰 한다는 건 여성 배재 없이는 성추행을 못 끊는다는 거니?'라는 공감 결여의 주장이 준호의 마음을 더 헛헛하게 만들었다. '펜스룰'은 저급하고 저열하며 스스로가 성범죄자임을 드러낸다'는 유명 교수들의 발언들에서도 무언가 떡하니 가로막힌 벽을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홍성수 교수 "펜스 룰은 저열한 대응"

http://www.honam.co.kr/read.php3?aid=1520437347549331215


표창원 "펜스 룰은 스스로 성범죄자임을 드러내는 것"

http://www.breaknews.com/sub_read.html?uid=564794§ion=sc1


준호는 어떻게 자신을 지켜야 하는지에 대해서 의구심이 들었다. "'미투 운동'에 힘입어 평소에 나에게 악의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던 누군가가 나를 협박, 신고한다면 나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거지?" 설령 3년을 사귀었던 전 여자친구가 자신을 신고한다고 하더라도, 손발이 묶인 채로 처연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현실에 준호는 한숨을 내뱉었다. 법에게 맡긴다면, 준호가 우려한 '무고'는 해소될 수 있을까?



'미투'에 남성 피해자와 무고 피해자는 없다.

성범죄 고발이 쉬워지고, 처벌이 강화되는 움직임은 준호 또한 바랐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남성 피해자'와 '남성 무고 피해자'에 대한 논의는 싹 빠진 시점에서, 준호는 다시 한 번 좌절했다. 전국민의 지지를 떠안은 이 '미투 운동' 속에서도 배재되어 있는 자신의 안위에 갑작스런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 난리통 속에서도, 남성 피해자는 여전히 여성을 신고할 수 없으며, 법은 무고 피해에 더욱 쉽게 노출되도록 개선되어 가고 있다.


미투 법안 봇물, 개헌 논의까지.

http://www.dailian.co.kr/news/view/699035/?sc=naver


"공공부문 성범죄 근절" 100일간 익명 특별신고

http://news.ebs.co.kr/ebsnews/allView/10841176/H




준호는 사회적으로 잠재적 범죄자라는 인식을 인정하기로 했다. 법, 인터넷, 이성 친구, 언론에서 그렇게 치부하니, 자신 또한 인정하기로 했다. 그럼에 더욱 단단한 벽을 쌓기로 마음먹었다. 어느 한곳도 내 편이 되어 주지 않는 사회 속에서 멍하니 길을 잃고 헤매다,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코가 베이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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