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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의 운명

어느 하루의 이야기

by 장명진


애지중지하던 턴테이블이 고장 나버린 때는 그이의 손가락이 어떻게 생겼더라 가물가물해지던 무렵이었다. 그이와 내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에 선물 받은 하늘색 클래식 턴테이블은 괴롭고 쓸쓸하던 시절의 내게 비틀즈를 들려주던 귀하디 귀한 물건이었다.


이미 사놓은 엘피를 썩힐 수도 없어서, 지난해였던가, 가성비를 고려해 아이리버에서 만든 9만 원짜리 턴테이블을 구매했다. 하지만 그 녀석에게는 별 애정이 가지 않아, 주방에 두고 가끔 새벽에 커피를 내릴 때 듣는 게 전부였다. 음질이 썩 좋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이사를 오며 본래 거실에 쓰던 하이엔드 오디오 오라노트를 다른 공간에 배치하게 됐다. 한 층을 단독으로 썼던 지난 집과 달리 이사 온 곳은 세 가구가 같은 층에 거주하기 때문이다. 음악을 듣느라 민폐를 끼칠 수 없어서 집의 2층 공간으로 메인 음악감상실을 옮긴 것이다. 덕분에 거실과 주방이 같이 있는 1층 라운지에는 친분 없는 아이리버가 자리하게 됐다.


그런데 사람처럼 물건에도 운명이 있는 걸까. 기묘하게 아이리버 턴테이블의 음질이 새 집에서는 비약적으로 향상된 것이다. 어제 봤을 때는 분명 유병재였는데, 오늘 아침에 보니 차은우가 되어 있는 꼴이다.(물론, 두 사람에게는 각자의 매력이 있다. 이게 더 나쁜가.)


아이리버 턴테이블에는 블루투스 스피커 기능이 있는데, 요즘은 거의 이 기능을 활용해 음악을 듣는다. 선예도가 높은 소리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납작한 디지털 음원을 몽글몽글한 아날로그 음원으로 바꿔버리는 신묘한 기능이 생겼다고 할까. 아이리버는 내 아이폰 속 모든 음원을 엘피 레코드 소리로 변환해 거실 공기에 더해주고 있다.


이제는 좀 예우를 해줘야 할 것 같아서, 방금 ‘화이트리버’라는 애칭을 지어주기로 했다. 지금 화이트리버는 ‘만춘서점’이라는 앨범의 음악을 연주 중이다. 재생한다는 표현보다, 화이트리버가 스스로 연주하고 있다는 느낌이 이 소리에 더욱 알맞다. AI를 탑재한 것도 아닌데, 사물이 스스로 연주가 가능한 수준에 이르는 걸 보면 사이버 펑크의 세상이 곧 도래할 것만 같다. 이것 참 말세로다.


2025.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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