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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엄마가 웃었다

by 작은물방울



와중에 사람들은 영정사진을 보며 “젊은 나이에 갔네” 라고 말했다. 친척들은 “마지막까지 예쁜 환자였다. 예쁘게 살다, 예쁘게 갔네” 라고 말하셨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엄마가 예쁘긴 했지’ 라는 생각만 동의했을 뿐이었다.


마지막 입원 전에 아빠는 당숙께 연락을 하셨다. 당숙이 장례와 관련된 일을 하셨고, 아빠는 장례에서 중요한 곳에 돈을 쓰고, 그렇지 않은 곳에 허투루 비용을 쓰지 않으시려고 노력하셨다. 그중 하나가 영정사진 준비였다. 사실 아빠는 엄마가 돌아가시기 보름 전부터 준비하라고 예견하셨지만, 나와 신랑 그리고 동생은 괜히 준비하기 싫었다.


엄마와 담낭암 재발이 확정되고, 양평 시장으로 나들이 갔을 때이다. 아직 항암 시작하기 전이라 엄마의 미모가 더 살아 있을 때 지나가는 말로 나에게 건네었다.


“사진 찍으러 갈까?”


그 말의 의미는 영정사진을 준비하자는 거였다. 나는 분명하게 들었지만 듣지 않은 척했다. 가서 엉엉 울어버릴 것 만 같은 마음과 엄마를 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이 공존했기 때문이다. 결국 사진을 찍지 못했다. 반면에, 엄마의 투병기에는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엄마의 미모가 암과의 싸움으로 인해 많이 상했고, 치열하게 병마와 싸워 체력도 겨를도 없었기 때문이다.


임종기에 다 달아서야 부랴부랴 우리는 영정 사진을 찾았다. 서랍에 있는 사진. 눈에 띄었다. 엄마가 환하게 웃고 계시진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 번듯했던 사진 하나. 바로, 여권사진이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장례식장에서 사진을 가장 덤터기 씌울 수 있는 게 사진이라는 말을 아빠에게 전해 듣고, 병원 근처 사진관에 사진을 장례식에 쓰일 수 있는 크기로 인화하러 갔다. 이틀 뒤에 찾으러 오라는 말을 듣고, 너무나 넉넉할 것이라 생각했던 나와 신랑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이틀을 채 기다려주지 않고 떠나셨다. 겨우겨우 아침에 전화해서 장례 첫날 오후에 찾을 수 있었던 사진이었다.


엄마는 그 사진에서 아주 살짝, 정말 아주 살짝 웃고 있었다. 어떤 이는 엄마의 환한 미소가 보이지 않아 아쉽다고 하지만, 우리로서는 최선이었다.


조문객이 없는 조용한 밤즈음, 엄마의 사진을 보았다. 여전히 예쁘고 젊고 다정했던 우리 엄마. 엄마가 같은 땅을 밟을 수 없는다는 사실이 와닿았다. 다시금 생각해 보니, 엄마의 영정사진으로 선택된 건 여권 사진이었다. 어디론가 외국을 떠나기 위해 필요한 여권, 그리고 자신을 대표하는 사진. 엄마는 그렇게 이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로 소풍 가나보다.


그래서 엄마의 영정사진이 여권사진이었나 보다. 약간은 미소 띈 엄마의 얼굴. 엄마는 웃고,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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