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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랑받는 DK Jan 30. 2017

상처 입은 영혼들에게,  <언더워터>

당신은 언제 전투 의지가 솟아나는가. 소위 말하는 ‘열정’ 말이다. 나이가 한 살 한 살 들수록, 이겨내야겠다는 것보다 포기하는 게 더 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여기서 말하는 포기는 경험에 따라 지혜롭게 길을 돌아가는 게 아니다. 계속된 실패로 더는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 상태다. 그렇다고 해도 당신을 책망하려는 게 아니니 안심하시길. 실패할 때마다 겪었던 마.음.의.상.처, 즉 ‘마상’ 때문에 무기력하게 주저앉아 있다면 이 영화를 보라!
  
‘낸시’는 그녀의 엄마가 처녀 시절 서핑을 타던 곳, ‘엄마의 해변’에 도착한다. 그녀는 투병 중이던 엄마를 얼마 전에 잃었다. 그에 대한 충격 때문이었는지 아버지에게 의대를 자퇴하겠다고 말했다. 대체 누가 그녀에게 징징대지 말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건 폭력이다. 그녀에게 어떤 외상도 없지만, 확실히 그녀는 아프다.
  
안 그래도 아픈데 늘 그렇듯 또 다른 시련이 찾아온다. 엄마를 그리워하며 서핑을 탄 것뿐인데 상어에게 뜬금없는 몸통 박치기를 당한 것이다. 게다가 허벅지를 사정없이 물려서 시뻘건 피를 물감 풀 듯 바다에 쏟아내기까지 한다. 마치 그녀의 삶에 충돌한 엄마의 죽음처럼 그 상처는 깊고 깊었다(특수분장을 정말 징그럽게 잘했다. 굿.). 그런데 ‘낸시’는 ‘마상’보다 외상에 좀 더 강한 걸까. 서핑을 타다 곧 상어에게 왼쪽 허벅지를 물리지만 특전사 같은 면모를 보여준다! 바로 이때부터 그녀는 자가 치료를 시작한 것이다.
  
우선 의학을 공부했다는 사람답게 리쉬를 이용해 야무지게 지혈부터 한다. 귀걸이와 목걸이를 사용해서 봉합까지 마친다. 그리고 상어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기 시작한다. ‘낸시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절대 가만히 있지 않는다.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할 정도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한다. 그런데 그것보다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그녀가 뭔가를 시도할 때마다 그녀에게 또 다른 외상이 생긴다는 것이다. 불산호에 발과 손가락을 긁히거나, 해파리에 어깨를 쏘이거나, 관제소에 코를 찧는다거나 해서 말이다. 그래서 영화가 끝날 때쯤 그녀는 꼴이 말이 아니다.
  
만신창이가 되는 걸 두려워하지 말자. 감사하게도 그녀는 시도할 때마다 또 다른 시도를 할 수 있는 발판을 얻었다. 늘 상처만 받지 않은 것은 신의 은총이었을까. 새로운 발판으로 그녀는 해변으로 갈 가능성을 넓혀갔다. 결국 ‘낸시’는 살았다. 그녀가 상어를 이기고 살아남았다는 게 전부가 아니다. 그녀는 살아남아서 비몽사몽 간에 엄마에게 말한다. “나 괜찮아요”라고. 그녀의 마지막 말이 주는 의미를 되새겨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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