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포트 주둥이에서 김이 피어올라요.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으로 사라지고 있어요. 더 이상 도망갈 데가 없어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뜨거운 물을 조심스레 커피 가루 위로 부었죠. 첫 만남에 봉긋한 거품이 생기며 향이 번져나가요. 희철은 커피를 머그잔에 붓고 잠시 기다렸어요. 뜨거운 건 위험하니까요. 위험한 커피에 입천장이 까진 이후 이 숭고한 의식이 자리 잡았답니다.
입천장 테러 사건은 삼 년 전, 세아를 처음 만났을 때 벌어졌어요. 회사를 관둔 후 사진작가가 되겠다고 홀로 강원도를 여행하던 때였죠. 일출 사진을 찍고 싶어 새벽부터 차를 몰아 대관령 꼭대기에 있는 안반데기에 도착했어요. 카메라를 들고 차에서 내렸을 때 깜짝 놀랐어요. 온 사방이 별이에요. 게다가, 은하수라니! 날 것의 냄새가 났어요. 다른 세계의 공기가 폐 속 깊숙이 스며들어 온몸을 뛰어다녔어요. 아무도 가본 적 없는 행성에 탐사선을 타고 지금 막 도착한 기분이었답니다. 어둠을 조용히 견디고 있는 별들을 보며 멍에 전망대에 올랐어요.
희철은 여기 오기 전에 휴대폰으로 ‘일출 사진 장소’를 검색했어요. 어떤 블로그에서 이 전망대가 일출 사진 찍기에 최적의 장소라고 하더라고요. 삼각대를 세우고 DSLR 카메라를 설치했죠. 춥네요. 추워요. 7월 한여름인데 왜 춥죠. 춥다는 이야기는 블로그에 없었는데. 차에 가서 담요라도 챙겨 와야겠어요. 어두운 계단을 겨우 내려가 담요를 들고 전망대로 돌아왔어요. 한 남자와 여자가 카메라를 설치했던 곳에 서 있었어요. 희철은 가슴이 철렁했어요. 카메라는 안 보이고 삼각대는 내동댕이쳐져 있는 게 아니겠어요. 여자의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어요.
“아빠, 저 사람이 주인인가 봐. 어떡해.”
남자, 그러니까 그 여자의 아빠라는 사람이 다가와 말했어요.
“혹시 이 카메라 주인이신가요?”
6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의 손에 희철의 카메라가 들려 있었죠.
“아니, 이게 왜?”
“이거 어쩌죠? 제가 카메라를 넘어뜨려서….”
남자가 희철에게 카메라를 건넸어요. 전원을 켜보았죠. 휴, 다행이네요. 살아있구나, 너! 떨어지면서 카메라 바디에 흠집이 나긴 했지만, 이만하면 운이 좋았어요. 뒤에 서 있던 여자가 다가와 꾸벅 인사하며 말했어요.
“죄송해요. 너무 어두워서 카메라가 있는 줄 몰랐어요.”
그 남자도 거들었죠.
“미안합니다. 어두워서 못 봤네요.”
순간 뭐라고 해야 할까 망설였어요. 물어내라고 해야 할까? 화라도 낼까? 이 고요한 곳에서 그러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겠어요? 그냥 넘어가기로 했어요.
“모르고 그런 건데요. 뭐.”
여자가 조금 더 다가와 물었어요.
“혹시 카메라에 이상이 있나요?”
“조금 흠집 난 거 말곤 괜찮습니다.”
“비싼 거 같은데….”
“비싸서 그런지 튼튼하네요.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희철은 애써 호탕한 척 답했지만, 속이 쓰린 건 어쩔 수 없었어요. 강원도 산꼭대기에서 남은 할부금을 걱정하게 될 줄이야. 아무튼 미안해하는 부녀에게 괜찮다는 말을 열 번쯤 했어요. 그리곤 다시 삼각대를 세워 카메라 세팅을 마쳤죠.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았어요.
그는 휴대폰으로 이런저런 기사를 보다가 주변을 둘러봤어요. 아까 그 부녀와 희철밖에 없었어요. 가끔 사람들이 오긴 했지만, 다들 별만 잠시 보다가 내려갔거든요. 근데 5미터쯤 떨어져 있는 부녀는 아직도 그 자리에 그대로네요. 아마 일출을 보러 온 모양이에요. 둘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다 여자가 희철에게 다가오는 게 보였어요.
“저기….”
“네?”
뜨거운 김이 오르는 종이컵을 내밀며 그녀가 말했어요.
“커피 한 잔 드시겠어요?”
“아, 고맙습니다. 잘 마실게요.”
“뜨거워요. 조심하세요.”
희철은 커피를 받아 들며 처음으로 그녀를 제대로 봤어요. 청바지와 흰 셔츠를 매치한 깔끔한 차림이에요. 작은 얼굴에 불안과 설렘이 미세하게 뒤섞여 있지만, 이목구비는 뚜렷해요. 동그란 눈매가 ‘나 착해요.’하고 광고하는 것 같은 인상이에요. 웃을 때 눈썹과 눈매가 반달이 되는, 강아지를 닮은, 그러니까 그렇다는 말이죠. 더 꾸밀 것도 없이. 그녀가 돌아가고 나서 카메라에 눈을 갖다 대며 생각했어요. 일출을 찍을 게 아니고, 그녀를 찍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그러면서 커피를 한 모금 마셨어요.
으악! 희철은 속으로 고함을 질렀어요. 고통에 몸을 배배 꼬며 생각했죠. 뜨겁긴 뜨겁네. 잠시 후 저쪽에서 그 남자의 으악! 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피식 웃었죠. 저기도 올 것이 왔구나. 커피 마시다 입천장 홀라당 까진 사람들의 모임이 있다면 여기 회원 두 명 추가요. 이어서 여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어요.
“아빠, 아빠!”
입천장 까진 것치곤 너무 과민 반응이 아닌가 싶어요. 고개를 돌려보니 남자의 실루엣이 안 보였어요. 가까이 가보았죠. 좀 전까지 멀쩡하던 남자가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어요. 그녀는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했어요. 희철은 일단 119에 전화부터 하고 남자를 등에 업었죠. 전망대 계단을 내려가 얼른 차에 태웠어요. 구불구불한 산길을 내려가다 대관령 초입쯤에서 구급차와 만났어요. 남자와 그녀는 병원으로 이송되었어요.
한바탕 난리를 겪은 후 희철은 다시 전망대로 돌아왔어요. 다행히 카메라는 그대로 있었어요. 다급했던 현장을 둘러봤어요. 휴대폰이 떨어져 있네요. 구형 폴더폰이었어요. 그 남자의 휴대폰 같아요. 막 해가 뜨고 있었지만, 희철은 삼각대와 카메라 그리고 휴대폰을 챙겨 철수했어요. 횡계까지 내려와 백반집에서 아침을 먹었죠. 혹시나 해서 주워 온 휴대폰을 켜봤어요. 잠금 설정도 되어 있지 않았어요. 최근 통화목록에서 ‘사랑하는 딸 세아’라고 저장된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어요.
세아는 희철의 전화를 받았어요. 아빠 휴대폰을 주웠는데 병원을 알려주면 점심때쯤에 갖다주겠다고 했죠. 전화를 끊고 병실로 돌아와 생각해 보니 아무 생각 없이 병원 이름을 말해준 것 같아요. 근데 그러면서도 오면 어떻게 고맙다고 말해야 할지 고민했어요. CT, MRI를 찍고 뇌혈류 초음파 검사까지 하고 의사를 만났어요. 급성 뇌경색이래요. 병원에 늦게 왔다면 위험했을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빨리 응급처치를 한 덕에 이만한 거라고 했죠. 그가 생각났어요. 상담을 끝내고 나오자, 희철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도착했대요. 병원 앞 주차장에 비상등을 켠 SUV 한 대가 서 있었어요. 그 사람이 내렸죠.
“아버지는 괜찮으세요?”
“네, 도와주신 덕분에 고비는 넘긴 것 같아요.”
“다행이네요. 걱정 많이 했는데.”
“감사해요. 나중에 꼭 보답할게요.”
“에이, 나중이 어딨어요? 보답하려면 지금 하셔야죠.”
희철은 휴대폰을 건네주고 차 조수석 문을 열었어요. 테이크아웃 커피 두 잔 그리고 하얀색 종이가방을 꺼내 들었어요.
“점심 안 먹었죠? 샌드위치하고 좀 샀는데, 이거 먹어주면 보답이 되겠는데요.”
“받아도 될지 모르겠어요.”
“저도 간호해 봐서 아는데 허기지면 힘들어요.”
“감사해요.”
“그럼.”
“네.”
희철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내질렀어요.
“날씨도 좋은데 잔디밭에서 같이 드실래요?”
병원 앞에는 작은 공원이 있었어요. 둘은 나무 아래 잔디밭에 야외용 매트를 깔고 앉았어요.
“사진작가세요?”
“아직 작가까진 아니고 흉내 내는 중이죠.”
희철은 휴대폰에 저장해 두었던 작품 사진 몇 장을 보여줬어요. 세아는 ‘우와’를 연발했어요. 희철이 조심스럽게 말했어요.
“그러고 보니, 저희 아직 이름도 모르네요.”
“저는 윤세아라고 해요.”
“세아씨. 예쁘네요.”
“네?”
“전 정희철이라고 해요.”
“아, 희철씨.”
“이러니까 소개팅하는 거 같네요.”
세아의 눈썹과 눈매가 반달이 되었어요. 희철은 네 살 어린 여동생 희수가 떠올랐어요. 희수는 언제나 강아지처럼 희철을 졸졸 따라다녔어요. 별것도 아닌 말 한마디에 웃음꽃이 터져 눈썹과 눈매가 늘 반달 모양이었죠.
“아버지하고 여행 중이셨어요?”
“네, 일출 보러 갔어요. 제가 얼마 전에 취직했거든요. 이제 여행 갈 시간도 없을 것 같아서.”
“아버지가 좋아하셨겠어요.”
“좋아하셨죠. 근데 이렇게 쓰러지실 줄은.”
“금방 회복하실 거예요.”
희철이 떠나고 세아는 병실로 돌아왔어요. 누워 있는 아빠 곁에 앉으니 미안한 마음이 일어났어요. 부모님은 보육원에서 자란 세아를 다섯 살 때 입양했어요. 입양 후 일 년도 되지 않아 엄마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죠. 열한 살 때, 또 한 번 불행이 닥쳤어요. 세아가 심장병을 앓았거든요. 아빠는 직장까지 관두고 세아를 간호했어요. 병원비로 재산을 거의 다 써 버렸을 때쯤 겨우 완치 판정을 받았어요. 아파트를 팔아 전셋집으로 옮기고, 5톤 트럭 한 대를 마련해 생활비를 벌었어요. 그마저도 한 달 만에 교통사고가 나서 아빠는 집에 몸져누워 있어야 했죠.
또 혼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세아의 머리끝까지 가득 찼어요. 불안감을 떨치고 싶어 학교에선 일부러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신나게 놀았어요. 그러다 집에 돌아와 신음하는 아빠를 본 세아는 미안해서 눈물이 났어요. 그다음부터는 기분 좋을 때마다 그 일이 떠올랐어요. 세아의 발목에 미안함이라는 족쇄를 채웠죠. 행복한 느낌이 들면 등 뒤에 불안감이 매달려 속삭였어요. 넌 고아 주제에 왜 이렇게 뻔뻔하냐고, 미안하지도 않냐고, 그렇게 살지 말라고. 세아는 가끔 불행보다 행복이 더 두려웠어요. 사람과 가까워질수록 불안감이 커져 어느 순간 멈추는 법을 배워야만 했어요.
그 사람이 가져다준 아빠의 휴대폰을 꺼냈어요. 낡은 폴더폰에 여기저기 흠집이 나 있었어요. 이제는 구하기도 힘들 정도로 오래된 휴대폰이에요. 회사에서 첫 월급을 받으면 바로 바꿔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폴더폰을 열었더니 작은 메모지가 떨어졌어요. 거기엔 삐뚠 글씨로 ‘정희철이라고 합니다. 이 번호 저장해 주시면 영광일 듯’이라고 적혀 있었어요. 메모를 읽고 세아는 피식 웃음이 났어요. 아직은 괜찮을까? 일단 그렇게 믿기로 했어요. 창밖으로 맑은 하늘이 보였어요. 소풍 가기 좋은 날씨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