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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을 향해

by 서효봉

소림사는 불타버렸다. 거기 있던 사람들도 대부분 죽었다. 혈교 아니 영래는 보란 듯이 소설가들만 남겨두고 모조리 죽인 뒤 희경을 끌고 가 버렸다. 인재와 민정, 동혁과 준수 그리고 루키는 한동안 정신 나간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그러다 인재가 입을 열었다.


“여긴, 소설의 세계에요. 만약 여러분이 이 이야기를 쓴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옆에 앉아 있던 준수가 말했다.


“찾아 나서야겠죠. 그런데 어떻게, 어디로 가야 할까요?”

“소설의 세계로 오기 전에 양 교수님이 이야기한 거 기억나세요?”

“아, 다른 세계로 가려면 소설 속에 숨어 있는 현자들을 찾으라는 말?”

“네, 이전 세계에선 그 마법사가 현자였던 거 같은데…. 여긴….”

“그러니까…. 그 현자가 누구지?”


다시 정적이 흘렀다. 총명한 민정은 강시들을 이끌고 나타난 할아버지 때문에, 루키는 납치된 희경 때문에 충격을 받아 멘붕 상태였다. 민정이 옆에 앉아 있던 동혁이 인재에게 말했다.


“근데, 말이야. 무림 연맹이라는 게 그 구파일방이라는 문파들이 모이는 거 아냐?”

“대체로 그렇죠. 왜요?”

“아니, 뭔가 좀 이상해서. 그 구파일방에 거지들도 포함된 거 아닌가? 일방이 개방이라고 알고 있는데….”

“맞아요. 아홉 문파와 개방을 합쳐서 10개의 문파를 구파일방이라고 부르죠.”

“근데, 아까 거지 대장은 없었는데?”

“거지 대장? 아, 개방의 방주? 혹시?”


방향을 잡은 소설가들은 다시 거지들의 소굴을 찾아 나섰다. 여전히 민정과 루키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인재는 마을에서 거지들을 붙잡고 어딜 가면 방주를 만날 수 있냐고 물었지만, 모른다는 대답만 들었다. 그들은 그들끼리도 서로의 존재를 잘 모르는 모양이다. 날이 어두워져 거의 포기한 상태로 숙소로 돌아가는데 길에 강아지 한 마리가 나타나 인재를 따라왔다. 인재를 따라온 강아지는 풀이 죽어 있는 민정 옆에서 온갖 애교를 다 부렸다. 민정이도 기분이 좀 나아졌는지 먹을 걸 가져와 강아지에게 나눠주며 놀았다. 다음 날, 거지 수십 명이 숙소에 찾아왔다. 강아지를 마치 VIP 고객 모시듯 에스코트했다. 인재에게 종이 하나를 전하고는 가버렸다. 종이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용건이 있거든, 삼칠교 아래에서 무영을 찾으시오. 그럼.’


인재와 민정은 개방의 방주가 보낸 메시지가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수소문한 끝에 삼칠교를 찾을 수 있었다. 그 아래 사는 거지들에게 무영을 찾아왔다고 말했다.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무영은 아주 잘생긴 거지였다. 민정은 컨디션이 저절로 회복된다는 둥, 진짜 잘 생겼다는 둥 혼자 중얼거리더니 말했다.


“저기, 혈교를 찾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혈교?”

“네, 혈교요.”

“죽으려고?”

“네? 무슨 그런 살벌한 말씀을.”

“혈교는 찾지 않는 게 좋아. 꼬마야. 모르는 게 약이지.”


인재는 화산파와 소림사에서 있었던 일을 무영에게 자세히 전했다. 무영은 이미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으나, 인재와 민정이 그걸 알고 있고,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하니 놀란 듯했다.


“그래, 찾아가서 뭘 어쩌려고?”

“잡혀간 사람도 구해야 하고…. 다른 세계로….”

“다른 세계?”

“네, 이런 말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무영은 다른 세계라는 말에 눈을 반짝이더니 인재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었다. 그리곤 옆에 앉아 있는 강아지를 쓰다듬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별아, 드디어, 집에 갈 때가 되었나 보다.”

“네?”

“아닐세. 혈교는 비밀스러운 단체야. 우리 개방조차도 그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다 알지는 못하네.”

“그럼….”

“다만, 그들의 본거지는 이미 파악해 둔 상태지.”

“본거지가 어딘가요?”


무영은 처음에 보였던 심드렁한 자세를 180도 바꿔 자신이 직접 안내하겠다고 말했다. 인재와 민정, 동혁과 준수 그리고 루키는 무영을 따라 혈교의 본거지인 혈산으로 향했다. 혈산은 말 그대로 피처럼 붉은 산이었다. 어떻게 산이 저렇게 새빨간 색일 수 있을까 싶을 정도. 혈산까지 가는 동안 중간에 많은 방해꾼을 만났다. 하지만 역시나 무영의 손짓 한 번에 다들 허망하게 사라졌다. 혈산 입구에 닿자 무영이 일행을 향해 말했다.


“사실, 나도 다른 세계에서 왔다네.”

“네? 다른 세계요?”

“그래, 그대들이 지나왔다던 그 세계의 엘프로 평화롭게 살다 그놈이 나타나는 바람에 여기 갇혔지.”

“엘프요? 설마. 그놈이라면?”

“소림사에 나타났다던 그 얼굴 말일세. 세계를 뒤흔드는 존재.”

“…….”


혈산 앞까지 겨우 오긴 했지만, 막상 혈교의 본거지라 생각하니, 들어갈 수나 있을지 의문이었다. 무공을 익힌 사람은 무영과 민정뿐이고 나머지 인재와 동혁, 준수, 루키는 짐이니까. 작전이 필요했다. 인재가 무영에게 말했다.


“그럼, 다른 세계로 가는 방법을 아시는 거죠?”

“방법? 그래. 아마 자네들도 알 텐데? 이 이야기의 엔딩 장소에서 죽으면 되네. 간단해.”

“간단하다고요? 만약에 엔딩 장소가 아니면요?”

“뭐, 그냥 죽는 거지.”

“그러니까 그게 엔딩 장소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냐는 거죠.”

“그건 나도 모르네. 그걸 알면 내가 여기 이러고 있겠나?”

“아니, 현자는 안다고…. 양 교수가….”

“양 교수? 아, 그놈! 조심하게. 그놈이나 저놈이나 다 똑같은 놈들이야. 저 인간을 여기로 끌고 온 게 그놈이라고.”

“네??”


인재는 어지러워졌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걸까? 양 교수가 영래를 데려왔다고? 지금 이 말을 믿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아, 모르겠다. 일단 탈출이 중요하다. 다시 작전 회의에 돌입.


“엔딩 장소는 모르지만, 이 세계는 은하수가 하늘에 걸리는 시간에 문이 열리는 건 틀림없네.”

“은하수?”

“그래. 내가 이 세계에 10년 넘게, 있으면서 알게 된 걸세. 은하수가 하늘에 걸리는 날 다른 세계의 존재들이 오고, 이 세계의 존재들이 사라진다는 걸 알게 됐다네. 그리고 마침 오늘이 그날일세. 그믐이라 문이 더 잘 보일걸.”

“죽어야 한다면서요?”

“그러니까! 문이 보이는 장소가 엔딩 장소고, 거기서 죽으면 된다고.”


죽으면 된다, 라니 죽는 걸 너무 쉽게 이야기하는 거 아닌가? 일단, 혈교의 본거지에 들어가면 무영과 민정이 강시들을 맡고, 나머지 네 명의 소설가들은 은하수가 걸린다는 혈교의 제단을 찾기로 작전을 짰다. 하지만 허망하게도 혈교의 입구부터 내부까지 강시는커녕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빈 광장을 지나 계속 길을 따라 뛰어 들어갔는데 아무것도 없으니 오히려 불안했다. 수많은 계단을 오르고 올라 혈교의 제단이 있다고 알려진 혈산의 꼭대기에 닿았다. 너무 쉽게 도착했다. 이제 그냥 죽으면 되나? 그때 소림사에서 겪었던 것과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하늘에 검은 구름이 몰려와 핏빛 비를 내렸고, 강시들이 땅에서 솟아올랐다. 구름 때문에 은하수는 보이지 않았고, 그 검은 얼굴이 다시 등장했다. 그리고 그 옆으로 나타난 여자. 희경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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