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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실 Oct 05. 2022

왕복 4시간의 출퇴근길 아르바이트

어쨌거나 서두르는 길

친구 중 한 명이 왕복 5시간을 걸려 출퇴근을 한다고 말했던 것이 떠오른다. 버스를 타고 나와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는 여정을 하루에 두 번씩 주 5일 동안 하는 것이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럴 거면 차라리 자취를 하는 게 낫지 않냐고 말했다. 하지만 친구의 논리는 확고했다. 자취를 하면 매달 최소 50만 원을 고정으로 지출해야 한다. 월세라도 높으면 숨만 쉬는데도 100만 원이 그냥 나간다. 그렇게 계산했을 때 5시간의 출퇴근길을 견디면 최대 100만 원을 벌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친구는 자신의 출퇴근길이 5시간에 100만 원을 버는 고소득 아르바이트와 다르지 않다고 주장했다. 가만히 들어보니 친구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었다. 그때만 해도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이제 그 친구는 차를 구입해서 자차로 출퇴근을 한다. 반대로 내가 왕복 4시간의 출퇴근길을 버티는 힘은 그때 그 친구의 논리에서 솟아난다.


집에서 7시 출발, 회사에 9시 도착. 출근하는데 정확히 2시간이 걸린다. 퇴근 또한 6시가 되자마자 눈치 보지 않고 회사를 나와 지하철을 타면 집에 도착하는 시각이 8시 언저리다. 이렇게 딱 떨어지는 4시간의 출퇴근길을 구성하기까지 수많은 실험이 있었다.




출근 첫날, 초행길에 대한 걱정 때문에 집에서 조금 일찍 출발했다. 7시 7분에 도착하는 지하철을 타기 위해서 늦어도 6시 15분에는 일어나야 했다. 직장생활을 한 지 5년이 넘었으니 이직이 뭐 특별하겠나 싶었지만 첫 출근에 대한 걱정과 설렘으로 인해 밤잠을 설쳤다. 이전 직장으로 출근할 때보다 1시간 정도 일찍 일어나는 거였지만 첫날이라 그런지 일어나는 게 힘들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부지런하게 출발한 만큼 일찍 회사에 도착하자 출근 지하철 시간을 조금 늦춰도 되겠다는 계산이 섰다. 다음날부터 조금씩 출근 시간을 늦추기 시작해 급기야 7시 24분 열차를 타게 되었다.


7시 24분 열차가 아슬아슬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아침에 조금이라도 더 잘 수 있다는 것이 더 소중했다. 하지만 모두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걸까? 아침잠을 늘릴 수는 있었지만 열차에 앉을자리는 없었다. 환승역까지 1시간 20분을 꼬박 서서 가는 것은 앉아서 갈 때보다 시간이 느리게 갔다. 무릎 뒤쪽이 뻐근하게 느껴질 때면 제자리에서 다리를 굽혔다 펴길 반복했는데 이것도 사람이 몰리기 전이나 가능했다. 게다가 환승 열차와의 시간 간격이 애매해서 내리기가 무섭게 뛰어야 했다. 결국 나는 7시 17분에 출발하는 열차로 타협을 봤다. 어느 정도의 늦잠과 앉을자리를 동시에 보장해주는 열차 시간이었다.


일단 지하철에 자리를 잡고 앉으면 할 수 있는 일이 많다. 잠을 잘 수도 있고 책을 읽을 수도 있으며 음악을 듣거나 영상을 시청하는 것도 물론 가능하다. 그중 내가 선택한 것은 바로 책을 읽는 것이다. 출근길 2시간을 열차 안에만 앉아있어도 돈을 버는 거라 생각하기는 하지만 이왕 유익하게 보내면 더 좋지 아니한가. 마음에 드는 책을 만나 눈 한 번 쉬지 않고 읽는 날에는 이틀 만에 500페이지짜리 책 한 권을 다 읽기도 한다. 그러다 너무 졸린 날에는 잠시 책을 덮고 눈을 붙였다 뜨면 환승역에 성큼 가까워져있곤 한다. 덜컹거리는 열차 안에서 시간의 흐름도 잊은 채 책에 집중하고 있으면 덜컹이는 소리가 차츰 가라앉고 책 위로 햇빛이 화사하게 반사되는 순간이 있다. '지하'철이 지상으로 올라올 때면 아침 햇살이 지하철 창문을 통해 들어온다. 그럴 때면 아무리 졸려도 눈을 뜨고 창밖을 본다. 내가 놓치고 있는 아침 풍경을 조금이라도 누리기 위해 창밖으로 빠르게 지나는 나무들과 변하지 않는 하늘을 바라본다.




출근길에는 최대한 느지막하게 사무실로 들어가지만 퇴근길에는 누구보다 빠르게 6시가 되자마자 사무실을 나선다. 하지만 아무리 서둘러도 두 시간이 흐른 뒤 지하철역에서 내리면 이미 밤이 되어있다. 나는 캄캄한 하늘 아래를 걸어 집으로 들어간다. 어느 드라마에 나오는 대사처럼 나의 평일은 저녁 없이 바로 밤을 맞이한다. 그렇다고 나의 퇴근길이 어둡고 칙칙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출근길에 아침 햇살을 받아내던 열차가 퇴근길에는 도시의 야경을 받아낸다. 퇴근길만의 낭만에 젖어 이번에도 잠시 책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어 야경을 감상한다. 회사를 나설 때만 해도 가까스로 걸려 있던 태양이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한강을 가르는 다리 위로 빽뺵하게 줄지어선 자동차의 불빛과 가로등이 도시를 밝힌다. 잠깐의 화려한 야경을 지나면 다시 고개를 숙이고 책을 읽기 시작한다.


언제부턴가 환승역인 고속터미널역에서 악기 연주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9호선에서 3호선으로 갈아타는 그 넓은 부지가 바삐 걸어가는 사람들로 가득한 가운데 나 역시 걸음을 바삐 옮겨 제시간에 3호선을 타는 것에만 집중던 순간이었다. 스트링을 오가며 나는 구슬픈 소리의 출처를 따라가니 3호선으로 가는 에스컬레이터 바로 옆에 한 바이올리니스트가 서 있었다. 큰 키와 건장한 체구의 그는 홀로 바이올린을 켜고 있었다. 바쁘게 지나치던 사람들도 본능적으로 그에게 눈길을 줬고 잠깐 멈춰서 음악을 감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다들 삭막한 퇴근길에 펼쳐진 의외의 풍경에 다소 놀란 듯 보였지만 인상을 찌푸리는 사람은 없었다. 나의 퇴근길에 음악을 뿌려준 그에게 내심 고마운 마음이 들다.




출퇴근길의 사람들을 보면 모두가 정확히 제 갈 길을 아는 듯 빠르게 서로를 지나친다. 잠깐 멈춰 서서 출구 정보를 보거나 지하철의 방향을 살피는 사람들은 이방인처럼 보인다. 나 역시 주저하지 않고 앞을 향해 나아가지만 가끔은 확신에 찬 발걸음이 낯설기도 하다. 다들 정말 자기가 갈 길을 아는 걸까? 회사든 집이든 갈 데를 알고 가는 모습이 당당해 보이면서도 어쩐지 쫓기는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는 목적지를 알고 가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 걷고 있는 길을, 출퇴근길을 벗어나고자 걸음을 재촉하는 것은 아닐까? 아마도 왕복 4시간의 짧은 아르바이트를 마치는 밤마다 뿌듯함보다는 해방감을 느끼는 이유와 같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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