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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래블메이커 Jun 08. 2022

아빠는 2억이면 되냐고 물었다.

자식의 실패란 부모에게 어떤 의미일까?

나는 대학입시시험, 즉 수능시험을 3번 도전했다. 삼수로 대학에 진학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렇게까지 대학에 갔어야 했나... 대학에 가지 않았더라면 또는 재수를 마치고 욕심을 버리고 점수에 맞게 대학에 들어갔더라면 내 인생이 지금과 많이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첫 번째 수능

고등학교 2학년부터 성적이 뚝뚝 떨어졌다. 공부 자체가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느껴졌다. 막막했다. 말 그대로 책에 쓰여있는 글자를 읽고 외웠다. 고3이 되자, 반에서 나보다 공부를 못하는 친구가 없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나는 야자를 매일매일 빠지지 않고 했다. 나는 내 성적에 문제를 찾지 못하고 책상을 붙들고 시간을 보냈다. 아마 그렇게 나의 인내심은 이때부터 길러진 것 같다. 그렇게 첫 번째 수능에 실패했다. 목표 점수에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성적이었다. 나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성적으로 자연스럽게 재수를 선택했다.


두 번째 수능

재수학원에 등록했다. 재수학원 종일반 또한 수능성적으로 반을 나누었다. 창피했다. 재수학원이 뭐라고 이렇게 차별을 둘까 싶었다. 어차피 하는 재수생 생활. 나는 시간이 많다고 생각했다. 적당히 공부하며 전국에서 올라온 재수 성공을 꿈꾸는 친구들을 두루두루 사귀었다. 살도 포동포동 쪘다. 몸도 아프지 않았다. 참 재미있는 재수생 시절이었다.


나의 두 번째 수능 성적은 적당했다. 점수는 어설펐다. 이 당시 교육 체계가 바뀌면서 다양해진 대학입시 전형으로 잘만하면 목표 대학에 갈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목표 대학으로 원서접수를 했다. 모두 떨어졌다. 목표 대학에서 탈락 통보를 받은 날, 갑자기 아빠가 그 대학 입학처로 가자고 했다.



아빠가 탈락 통보를 받은 대학교로 가자고 했다.




아빠가 화가 많이 난 것 같았다. 아빠를 말릴 수 없었다. 점수를 물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빠와 나는 차 속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아빠가 나의 탈락 소식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 사살) 확인하고자 그런가 보다’ 라고 생각했다.


모 대학의 입학처장을 만났다. 아마 그 입학처장도 갑작스러운 학부모의 방문에 굉장히 당황했을 것이다. 다행히 입학처장은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듯이 아빠에게 소파에 앉으시라고 손짓하며 안내했다. 아빠는 가죽소파에 앉아 한참을 말을 하지 않더니,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


'수능 말고, 대학교에 입학할  있는 방법은 없나요?'


이게 무슨 말이지? 나는 순간 당황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얼른 이곳을 나가고 싶었다. 아빠는 갑자기 울기 직전의 표정으로 한숨을 계속 쉬었다. 그 입학처장은 아빠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 기여금, 기부금 입학 전형이 한창 거론되고 있기는 한데.. 외국에서는 그런 방법이 있죠.'  


아빠는 갑자기 눈을 크게 뜨고 입학처장을 바라보았다.


'그런 것은 얼마면 되나요? 한... 2억이면 가능한가요?'




2억

나는 그 당시 2억이라는 돈이 얼마나 큰 돈이고, 또 얼마나 적은 돈인지 잘 알지 못했다. 경제활동을 하기 전이었고, '억'이라는 단어는 나에게는 꽤나 큰돈으로 생각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빠에게 그 당시 2억은 전 재산과 같았으며, 아빠는 그 순간 매우 진지했다. 단, 입학사정관이 느끼는 2억이 문제였다. 미국 사립대의 경우의 유명 재벌가 또는 정치인들이 50억 이상의 규모로 거액의 기부를 하고 입학을 한다. 따라서 그에게 2억이란,  터무니없는.. 그런 적은 돈이었을 수도 있었겠다. 


아빠의 말을 들은 입학 사정관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 후에 그 둘의 대화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확실히 들었지만 내가 기억 속에서 지워버렸는지도 모른다. 학교에서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도 생각나지 않는다.


세 번째 수능

내가 두 번째 수능을 볼 때까지 즉 삼수를 결정하기 전까지 아빠는 불교신자였다하지만 내가 두 번째 수능을 실패하고 나서는 아빠의 종교심이 사라졌다. 아빠와 나와의 사이는 더욱 서먹해졌다.


나는 또 다른 재수학원에 들어갔고, 모두 내려놓고 진심을 다해 공부했다. 어떤 언니가 이런 말을 했었다. 적당히 공부하면 살이 찌고, 열심히 공부하면 살이 빠진다고. 나는 삼수 생활을 하며 자연스럽게 살이 십이키로나 빠졌다. 다행히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일부러 친구를 사귀지 않았다. 다행히 나를 불쌍하게 여겨준 동생들과 친구 몇몇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학원 생활을 했다. 현재 이들은 내 평생 친구가 되었다.


나는 이 시기쯤 마음 속에 종교를 가졌다. 나 말고 나를 구원해줄 사람이 없다는 걸 깨닫고, 모의고사 성적이 안 좋을 때면 기도를 하러 홀로 종교시설로 갔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수능 시험을 3번째로 보게 되었다.




수능이 끝나고, 전국으로 다시 뿔뿔이 흩어진 재수학원 친구들에게 편지를 부치러 우체국을 방문했을 때였다. 목표로 했던 대학교에서 수능우수자 전형으로 합격했다는 전화를 받았다. 우체국에 앉아 잠시 조용히 펑펑 울었다. 친한 친구에게도 전화를 걸어 축하를 받았다.  



대학입시공부를 했던 3년을 돌이켜보면 나의 20대 초반을 실패한 것 같다는 생각도 많이 했었다. 하지만 자식의 그런 실패에 뒤에서 더 많이 아파하던 부모님을 보았다. 대신 공부해줄 수 없는 부모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또한 돈으로 대학을 입학시킬 수 없는 부모가 해줄 수 있는 것 또한 없었다. 아빠는 나의 2년 동안 자신의 인생도 실패했다고 느꼈을까.


아빠의 2억. 나를 위해 쓰이지 못했던 그 2억은 지금 무엇이 되어있을까. 아빠의 집의 일부가 되어있을까? 지금은 시골집도 사기 어려울 정도로 적은 돈이 되어버린 2억.


갑자기 아빠의 2억 발언이 떠올라 웃음이 그치질 않고, 잠을 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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