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진아 <운이 좋았지>
겨울의 맑은 하늘이 숨고 나면, 계절의 작은 마디마디를 알리는 꽃 보는 재미에 삽니다. 벚꽃이 다 지고 나서 헛헛해하고 있었더니, 도로변에 가득한 철쭉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등산복으로 만들면 눈에 잘 띄겠다 싶은 짙은 자주색, 그리고 웨딩드레스처럼 눈부신 흰색 철쭉이 가장 많아요.
철쭉을 제대로 구경할 만한 곳이 없을까, 찾다가 네즈신사에 철쭉원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 도시에서 만 9년을 살았는데, 왜 이렇게 모르는 정보가 많을까요. 4월 한 달 동안만 철쭉을 구경할 수 있다는 소식에 마지막 주 연휴 동안 할 일 목록에 추가해 두었습니다.
호기롭게 시작한 연휴 첫날에는 감기를 앓은 언니에게 해물탕과 장어 튀김을 대접하고, 다음 날에는 겨울 옷을 정리했습니다. 부지런을 떤 건 딱 여기까지였어요. 그날 저녁부터 저는 아늑한 새장 같은 방에 틀어박혀 언니가 남긴 술을 마시다 자고, 오디오북을 듣다가 자고, 소설을 읽다가 자는 행위를 반복했습니다. 중간에 마감 있는 번역은 겨우 넘겼지만, 그보다 중요한 다음 필사책 작업은 손도 대지 못했네요.
순식간에 칩거할 수 있는 4월의 마지막 휴일이 오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엉뚱하게도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한때 그토록 바랬고, 지금은 체념하다시피 한 아이가 정말 있었다면, 이렇게 뒹굴거리지 못했겠지. 그 아이가 철쭉원에 가고 싶다고 하면 당장 집을 나섰겠지, 하고요.
혼자 산다는 건, 어쩌면 회사에서는 나의 가장이 되고, 집에서는 나의 양육자가 되어, 여전히 돌볼 구석이 많은 ‘나’란 아이를 키우는 일인지도 몰라요. 딸아이의 응석을 받아주는 마음으로,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외출을 결심했습니다.
나가 보니, 이게 뭐 별거라고 그렇게 미적거렸나 싶더라고요. 다닌 적은 없지만 익숙한 동경대와 어쩐지 품격 있어 보이는 분쿄구의 골목골목을 지나 네즈 신사 앞에 다다랐습니다. 예상대로 철쭉보다는 꽃처럼 차려입은 사람들이 많았어요. 만개의 정점이 지난 4월 말이라 대부분은 이미 햇살에 탄 듯 말라 있었지만, 평소 보기 어려운 선홍색, 진홍색, 보라색 꽃과 그 위를 노니는 빛멍울이 참 어여뻤습니다. 혼자 하는 꽃구경은 참 오랜만이었는데, 셀카를 찍을 정도로 자기애가 강하거나 행인에게 부탁할 정도로 외향적이지 못해(술이 한 모금 들어간 상태라면 문제없겠지만) 철쭉원 속 제 모습은 기록이 없습니다. 여름에 혼자 떠날 삿포로 여행을 위해 뻔뻔함과 사교성을 길러야겠네요.
네즈신사를 나서서 단고자카로 가는 길에 미리 봐 둔 카페가 있었는데, 철쭉원 못지않은 인구밀도를 자랑해 문 앞에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그대로 집으로 갈까, 하며 자주 올 일 없는 동네를 하릴없이 걷다 보니 빈자리가 있는 아담한 카페가 눈에 들어왔어요. 오랜만에 쫴는 봄볕에 달아오른 몸을 아이스라테로 식히며 장대건 작가의 <급류>를 마저 읽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혼자 카페에서 책을 읽는 행위도 오랜만이더라고요. 한편으로는 귀찮아서, 한편으로는 돈이 아까워서, 그런 한가로운 외출은 삼가 왔거든요.
앞으로 이 정도로 소박한 바람 정도는 가끔 들어줘도 좋을 것 같습니다. ’카페에서 책‘이 ’펍에서 기네스,‘ ’바에서 칵테일‘로 뻗어나갈 것 같은 예감이 들지만 까짓것, 애가 하고 싶다는데요, 뭐.
겨울과 겨울이 아닌 계절의 차이는, 방 안에서도 느껴집니다. 식물의 성장세는 차원이 달라요. 늦겨울, 나지막한 높이에서 겨우 잎을 펼쳐 나를 아쉽게 한 극락이(극락조화)도 대를 하루하루 힘차게 뻗어내고 있고, 봉래(봉래초)도 올해 첫 새 잎 출시를 앞두고 있습니다. 고수와 바질은 화분은 하루가 멀다 하고 목이 마르다 아우성이고요. 제가 잎을 따먹는 속도가, 새 잎이 자라는 속도를 쫓아가지 못할 지경입니다.
내가 키우는 식물에 부끄럽게도, 느린 자살을 실천하듯 긴 겨울을 지나왔습니다. 지금도 사는 듯 산다고는 할 수 없지만, 오래 좋은 글을 써 달라며 심신과 영혼의 건강을 돌보는 책을 선물해 주신 독자님의 정성에, 그리고 누군가 곁에 있든 없든 나는 사랑스럽고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말해 주는 누군가의 응원에, 기운을 차리려 노력합니다.
긴 터널이 다 지나가고
단단한 마음을 갖게 됐으니
아주 자잘한 후회나 여운도
내게 남겨 주지 않았으니
나는 운이 좋았지
권진아 곡 <운이 좋았지> 중에서
실은 이 글을 쓴 지는 2주가 지났는데, 소개할 만한 요리를 만들지 못해 업로드가 늦어졌어요. 비상식량 칸에 남은 마지막 고추참치캔으로 만든 파스타예요. 철쭉처럼 붉지요. 내일 저의 도시락 메뉴인데, 날씨가 좋다면 회사 근처 공원 벤치에서 먹은 후 고양이들과 인사를 나눌 계획입니다.
재료: 고추참치 1캔, 푸실리 150g, 파 2T, 다진 마늘 1T, 토마토소스 1T, 식용유 2T
1. 푸실리는 포장지에 적힌 시간만큼 끓는 물에 삶는다.
2. 프라이팬에 식용유를 두른 후 중약불에 다진 파와 마늘을 볶는다.
3. 2에 기름을 뺀 고추참치 캔과 토마토소스, 삶은 푸실리를 넣고 버무린다.
유월이 되면 저는 수국을 보러 또 어디론가 나들이를 떠나겠지요. 가능하면 그전에도 마음 상태를 보고하는 편지를 한 번 더 부치겠습니다.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기 전의 쾌적한 날씨를, 미루면 사라지는 선물인 양 한껏 누리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