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이 시작되었으나, 언제나처럼 개선된 것은 하나도 없는 여름의 초입이었다. 떠들썩한 주말을 보내고 돌아온 일상은 조용했고, 몸은 노곤했으며, 마음은 혼란했다. 자연스러운 월요병의 증상이었다. 좀처럼 잠에 들지 못하는 것도, 설명하기 꺼림칙한 악몽을 꾸다 수시로 깨는 것도.
새벽녘, 오디오북이나 들으까 싶어 켠 유튜브에 교회 채널이 떴다. 일본에 처음 와서 2년쯤 열심히 다니다, 늘 그렇듯 서서히 멀어지다, 코로나 시절에 단절되었다, 작년부터 종종 다시 찾게 된 한인 교회. 신앙이 깊지는 않지만 나는 그 공동체의 한결같음이 편안했다. 몇 년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순수함에 물들 것 같은 좋은 사람들은 그대로였다.
유튜브에는 그중 한 사람의 간증이 따로 업로드되어 있었다. (때로는 코드가 맞지 않아 매번 웃지는 못하지만) 늘 실없는 농담으로 말을 걸어 주시는, 교회 일에 누구보다 열심인 40대의 남자 집사님. 몇 년 만에 놀랄 만큼 거뭇거뭇해진 안색이 심상치 않았는데, 목사님의 통성 기도로부터 그가 간암 말기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13분짜리 짧은 간증에는 실례가 될까 차마 물어보지 못한 투병 과정과 함께, 반드시 이겨낼 것이라는 믿음, 혹은 이겨 내고 싶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병원에서는 지금처럼 맑은 정신과 외출 가능한 컨디션도 기적이라 했다는 말을 덧붙이며. 간식도 이야깃거리도 잔뜩 준비할 테니, 병원에 편하게 놀러 와 달라는 당부화 함께 짧은 간증은 마무리되었다.
음음한 밤, 몽롱한 의식으로 그 이야기를 듣다 조만간 병원에 가겠노라 다짐했다. 적어도 이번 주는 교회에 가서, ‘예은 자매, 왔어요?’라고 반겨 주는 미소에 어색한 웃음이 아니라 진심 어린 응원으로 화답하겠노라고.
간증을 다 들은 뒤로도 몇 번의 비자발적 기상과 강제 취침을 반복하는 사이 아침이 밝았다. 빈곤한 수면과 비 오는 날 저기압의 합작인 편두통이 온 신경을 삼켰다. 다시 밀린 잠을 청하려다 확인한 카카오톡에는, 부고 연락이 한 통 와 있었다. 어젯밤 11시 28분경 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나는,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과 혼자 만남을 기약했구나. 어리석게도.
저녁에 장례 예배가 열렸다. 화장을 마친 유골함이 단정히 놓여 있었다. 그 앞에서 서글픈 울음을 터뜨리는 그를 꼭 닮은 얼굴.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자식의 유골함을 가지러 한국에서 온(지금껏 내가 써 본 문장 중 가장 잔인한 말이리라) 어머니임을 알 수 있었다. 교회에는 유가족을 비롯해 여느 때보다 많은 사람이 모였다. 유학 시절 초반에 교회에서 자주 보았으나 나처럼 어느샌가 사라진 얼굴도 여럿이었다. 그가 일본에 살며 사랑했던 사람들은 거의 다 왔겠구나. 다만, 그는 없었다. 누군가 떠난 후가 아닌, 살아있는 동안 장례를 치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모든 장례 예배가 그럴까. 사람들은 찬양하다가도, 교를 듣다가도, 헌화하다가도, 울다 웃기를 반복했다. 더 볼 수 없다는 아쉬움에 눈물을 흘리고, 그러나 그가 천국에서, 그토록 사랑하는 분 곁에서 평안을 누리고 있으리라는 확신에 미소 짓는 듯했다. 그리고 나는 막막하고 불안하기만 한 내 시간을, 왜 저토록 삶이 간절한 사람에게 떼어 줄 수 없는지, 서러워서 울었다.
청년부에서 만든 추모 영상의 끝에, ’천국에서 만나요!’라는 메시지가, 슬라이드가 새하얗게 바뀐 뒤에도 오래 일렁였다.
문득 점심시간에 회사 동료가 던진 질문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어떻게 눈에 보이지도 않는 종교를 믿는 걸까요?
믿음은 선택이다. 나는 부와 명예가 내 삶을 지켜주리라 믿는 것이나, 사랑에 목메는 것이나, 신을 따르는 것이나, 불확실함 속 선택이라는 점에서 결국 비슷하다고 여긴다. 행여 허상이라 할지라도, 이해의 범주를 초월한 위안과 평안을 주고, 삶을 포기하지 않을 이유를 찾는다면, 갖는 편이 낫지 않은가. 물론 그 믿음의 실천이 타인에게 해악을 끼치지만 않는다면.
그래서, 믿어 보기로 한다. 나보다 더 세상에 유익할 그가 원치 않았던 병으로 40대에 세상을 떠나고, 내심 그런 죽음을 바라던 내가 덩그러니 남겨진 모순에도, 그럴싸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