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한, 삿포로 여행기 2
전날에 맞춘 새벽 5시 20분 알람이 울리기 무섭게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7시까지 집합 장소인 삿포로역까지 걸어가기 위해 여유 있게 계산한 시각이었다. 평소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민첩함으로 S보다 먼저 샤워와 화장을 마친 뒤, 호텔 2층에 자리한 얼음 정수기와 1층 로비에 놓인 커피 머신을 활용해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만들어 오는 여유까지 부렸다. 전날 산 편의점 샌드위치가 우리의 단출하지만 든든한 아침 식사였다.
새벽의 스스키노는 조명만 켜진, 텅 빈 무대 같았다. 바둑판처럼 정갈하게 구획된 거리는 유흥가 치고 청결했고, 인적 없는 거리에 걸린 호스트 클럽 포스터는 관람객 없는 처연한 장식처럼 보였다. 도쿄와 달리 쾌적한 아침 공기에 감탄하며 스스키노역에서 삿포로TV타워가 보이는 오도리역으로, 그리고 다시 멀끔한 오피스가인 삿포로역으로 사뿐히 걸음을 옮겼다. 북쪽 출구 주변 주차장에는 이미 대형 버스 여러 대가 투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여름 홋카이도 버스 투어는 천편일률적이다. 코스는 차 안에서 감상하는 패치워크 로드, 시리도록 푸른빛을 띠는 청의 호수와 굳이 가지 않아도 되지만 빼놓으면 섭섭한 흰 수염 폭포, 무지개색 꽃밭이 굽이굽이 펼쳐진 사계채의 언덕, 그리고 보랏빛 라벤더로 뒤덮인 팜 도미타. 점심은 대체로 비에이역에 자리한 준페이의 새우 덮밥 혹은 자유식. 온종일 낯선 사람들과 뻘쭘한 공기를 나누며 관광지를 우르르 순회하는 일이 편안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대중교통이 제한된 지역에서 면허가 없는 내게 애초에 선택권은 없었다.
(상기 이유로) 버스 투어는 잘 이용하지 않는데, 한국인 가이드 투어는 훨씬 더 오랜만이었다. 일본에 살면서는 8년 전쯤 부모님을 모시고 하코네 관광으로 다녀온 것이 전부였나. 후지산이 구름에 모습을 감춘 날, 무표정한 중년 남성 가이드와의 동행이 딱히 좋지도, 싫지도 않은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S야, 투어 코스는 다 비슷하길래, 제일 저렴한 곳으로 예약했어. 오픈 특가라 후기가 별로 없어서 조금 불안하지만, 괜찮겠지?"
"그럼, 가이드 님이 인솔만 잘해주시고, 기사님이 운전만 잘해주시면 됐지. "
가이드가 억지로 물건을 사게 하거나, 언어나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지만 않으면 상관없다는 낮은 기대감마저 일치해 안도했다. 집합 장소에서 만난 가이드 선생님은 가녀린 체형에 젠지 세대로 보이는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머지않아 우리는 그분을 '선생님'이라 부르며 신봉하게 된다.
'시간 엄수'와 '분실물 주의'와 같은 주의 사항을 들을 때부터 소풍 나온 유치원생이 된 기분이 들었다. 휴게실이나 관광지에서 화장실을 안내해 주실 때는 더더욱. 이동 시간에 틈틈이 홋카이도의 역사나 문화, 여행 팁을 모은 족집게 강좌를 열어 주셨는데, 특히 아이누 족에 관한 설명이 인상적이었다.
홋카이도와 러시아 일부 지역에 터전을 잡고 살았던 아이누 족은 고유한 언어와 문화를 보유한 원주민이었으나, 19세기에 일본에 땅을 빼앗긴 뒤 긴 차별과 억압의 역사를 감내하게 된다. 여기까지는 오래전 대학원에서 소수 언어를 연구하며 익히 접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비교적 최근인 2018년에 법적으로 그 존재를 인정받았다는 점과 아이누족과 홋카이도로 강제징용된 한국인 사이에 교류가 있었다는 사실은, 부끄럽게도 금시초문이었다.
선생님께서는 아이누족 어머니와 한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오가와 류이치의 자서전인 <어느 아이누 이야기>도 소개해 주셨는데, 안타깝게도 한글 번역본은 절판되었고 전자책으로는 제작되지 않은 상태다. 그래도 온오프라인 중고 서점과 도서관을 헤집다 보면, 분명 어딘가에 한 권은 있으리라.
만약 졸업 후에 연구를 계속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이 똬리를 틀었다. 소수 언어라니. 생계 수단 확보에 유리한 분야는 아니고, 한 우물을 진득이 팔 성정도 아니니 결코 전망이 밝지는 않았겠다. 게다가 한번에 한 길밖에 걸을 수 없는 잔인한 인생인데, 미련이 남는 선택지가 어디 그것 하나뿐이랴.
20대 중반이었던 내게 박사 진학보다 현실적 안정이 더 매력적이었듯, 30대 중반인 내게도 뜬구름 같은 상상보다는 돈을 내고 신청한 관광이 우선이었다.
첫 행선지는 패치워크 로드. 모양과 색, 패턴이 제각각인 옷감을 이어 붙인 퀼트처럼 밭을 자유분방하게 나눠 다채로운 작물을 심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밭보다는 곳곳에 모습을 드러내는 나무가 풍경의 주인공인데, 다른 랜드마크도 아닌 나무를 따라가는 여정이 퍽 귀엽게 느껴졌다.
패치워크 로드를 통과해 처음으로 발을 땅에 딛고 관람한 곳은 청의 호수. (선생님께서는 의미상 호수보다는 연못에 가깝다고 강조하셨다) 특유의 비현실적인 푸른색은 자연과 인간의 우연한 조화로 생겨났다. 1988년 화산에서 흐르는 진흙을 막으려 댐을 건설했는데, 인근 온천의 알루미늄 성분이 호수로 흘러 들어와 푸른빛을 반사하게 되었고, 바닥에 가라앉은 황과 석회가 그 색을 더욱 선명하게 보이도록 만든 것이다. (나를 포함한) 인파로 인해 그 청연한 아름다움을 차분히 감상하기는 어려웠지만, 싱그러운 풍경을 배경으로 S가 찍어 준 사진은 나의 새 프로필 사진이 되었다.
출출해질 무렵 비에이역에 도착해 점심시간을 가졌다. 비에이역 터줏대감인 준페이는 성수기라 매장 내 식사가 어렵고, 도시락 예약만 가능했다. 미리 조사한 바로는 퍽 극단적인 후기 탓에 확신이 서지 않았던 나는, 이 문제 역시 S와 의논하기로 했다.
"새우도 크고 소스는 맛있는데, 도시락은 어쩔 수 없이 눅눅하대. 그런데 더 괜찮아 보이는 다른 식당은 예약이 안 돼서 시간이 빠듯할 수 있어."
"집합 시간에 늦으면 안 되니까 그냥 도시락 먹고 여유롭게 카페라도 가자. 나 새우튀김 좋아해."
결과적으로 우리의 선택은, 우리에게 정답이었다. 새우의 온도나 질감보다는 소극적인 야채 비율이 아쉬웠지만, 1,600엔이 아까울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점심을 먹는 데 시간을 지나치게 할애하지 않은 덕분에 카페 기타보코에서 대두 향이 은은히 나는 오리지널 커피도 맛보고, 마을의 유일한 고층 건물에서 영화 세트장 같은 마을 전경까지 감상하지 않았던가.
본격적인 꽃놀이의 시작은 오후부터였다. 먼저 입장료 400엔이 드는 사계채의 언덕. 입구를 지나 언덕을 내려다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탄성이 흘러나왔다.
철저한 계산과 고된 모종 심기의 결과물이라 할지라도, 또 어디에서 이런 풍경을 볼 수 있을까. 예상보다는 인파가 몰리지 않아 산책하거나 사진 찍기에도 좋았고, 라벤더 밭 못지않게 촘촘히 아름다운 샐비어 밭 역시 애초에 나를 홋카이도로 이끈 보랏빛 환상을 채워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팜 도미타에서 파도처럼 요동치는 라벤더를 보는 순간, 그 판단이 오산이었음을 깨닫는다. 게다가 팜 도미타에는 라벤더 소프트가 있다. 경험자들 사이에서는 호평보다는 악명이 높지만, (민트초콜릿과 고수와 홍어를 좋아하는) 나의 특이한 취향 과녁의 정중앙을 자격한 향긋하고 오묘하고 달고 시원한, 그래서 평소에는 먹지 않는 와플 콘까지 먹어 치워 버린, 조금 과장해서 나의 인생 아이스크림이었던, 라벤더 소프트.
버스 투어에서 할당한 시간이 유일하게 짧다고 느껴진 장소도 역시 팜 도미타였을 것이다. 주어진 시간을 1초라도 초과할까 조마조마해하며 기념품 숍에서 구입한 라벤더 티와 라벤더 비누를, 선물 받을 누군가가 기꺼워해 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