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한, 삿포로 여행기 4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이 사람과는 어쩌다가 지금까지 알고 지내는 걸까. 친구 사이에서도 흐릿할 뿐이지, 마침표는 존재한다. 어느샌가 연락하기 껄끄러워진, 남보다 못한 이름들이 카톡 ‘친구’ 목록에 얼마나 많은가.
S와는 까마득한 20대 초반, 한 NGO 단체에서 만났다. 대학 졸업 후 첫사랑을 따라 무작정 한국에 들어온 나는 그곳에서 최저 시급을 받으며 1년쯤 일했다. 당시 대학생 인턴이었던 S와 나잇대가 비슷했기에 종종 같이 점심을 먹으며 친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월급을 더 많이 주는 회사로 이직한 뒤에도, 그리고 또 몇 년 뒤 도쿄로 유학을 온 뒤에도, 한국과 일본을 넘나들며 간헐적으로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다.
S와의 만남은 늘 편안했다. 상대의 사소한 표정이나 어감에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아도, (착각이라면 미안하지만) 서로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달까. 아마도,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지 않아도 되는 그의 담백하고 깔끔한 성향 덕분이 아닐까 싶다.
홋카이도를 함께 여행하면서, 내가 S를 좋아하는 이유를 하나 더 발견했다. 바로, 서로 보완 가능한 장점을 가졌다는 점. 이를 테면, 사전 계획은 잘 세우지만 한번 마음을 놓으면 나사가 완전히 풀려버리는 나를 위해 S는 마지막까지 빠뜨린 물건은 없는지 확인해 주거나 전철에서 방송을 주의 깊게 듣다 내릴 역을 상기해 주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S를 똑똑이라고 칭하며 고마워했고, 무심결에 이런 말도 던졌다.
“이렇게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 주는 사람이랑 살아야 하는데 말이지.”
미혼인 S와 결혼 경험이 있는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오타루역이 아닌 미나미오타루역에 제대로 내릴 수 있었던 것도 S 덕분이었다. 오타루역이 종점이자 시발점이기에, 미나미오타루에서 내려 오르골당을 시작으로 여러 상점과 운하를 구경한 후 오타루역에서 삿포로역으로 출발해야 앉아서 올 확률이 높다(는 선생님의 말씀이 있었다).
첫 행선지였던 오르골당에는 제법 신기한 모양새의 제품이 많았으나, 동시다발적으로 울려 퍼지는 멜로디에 귀가 피로해져서 오래 머물지는 못했다. 거리에 늘어선 식당과 카페, 공방도 상업적인 분위기가 다분해 크게 매력적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르타오 더블 프로마쥬 케이크의 진득한 치즈향에는 눈이 번쩍 뜨였고, 어느 와인 셀러에서 마신 디저트 샴페인이 무척이나 향긋했다.
12시에 우리는 스시 나카무라라는, 오타루에서 비교적 최근에 오픈한 스시집에 들어갔다. 오타루에는 미스터 초밥왕의 배경인 마사스시와 쿠키젠 등, 더 유명한 스시집도 많지만, 예약이 간편하고 스시 퀄리티도 무난해 보였기에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여행지에서 모든 식사를 마치 생의 마지막 만찬인 듯 치열하게 결정할 필요는 없으니까.
전체적인 경험은 지불한 금액을 크게 웃돌지도, 밑돌지도 않았다. 크림 같은 우니가 전채로, 그리고 스시로 두 번 나와서 만족스러웠고, 단일 피스로는 내장까지 낭비 없이 올린 새우가 가장 입에 맞았다.
제철 체리와 말차로 식사를 마무리한 뒤 오타루 운하를 걸었다. 1 킬로미터가 넘는 길이에 오래된 창고와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건물이 줄지어 자리하고, 곳곳에 다리가 설치되어 있어 기념사진을 찍거나 운하 한가운데에 서서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대체로 물이 흐르는 모든 도시 풍경이 그러하듯, 이곳도 야경이 훨씬 아름다우리란 사실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오타루(オタル)’를 거꾸로 했다는 ‘르타오(ルタオ)’가 역시나 이곳의 터줏대감인지, 크루즈 터미널 근처에도 멋스러운 매장이 하나 더 있어 마지막까지 꼼꼼히 둘러본 뒤, 삿포로역으로 돌아왔다. S는 이곳에서 더블 프로마쥬 케이크와 한정판 쿠키를 올린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주문했고, 나는 최대한 덜 비굴해 보이도록 노력하며 몇 입 뺏어 먹었다(그러고 보니 공항에서도…).
호텔로 돌아오는 길, 우리는 오도리 공원과 돈키호테, 그리고 슈퍼를 돌며 찐 옥수수와 흰 옥수수, 그리고 유바리멜론을 기어코 찾아냈고, 마지막 식사로 징기스칸을 한 번 더 먹었다. 먹킷리스트 중 유일하게 지우지 못한 삿포로 라멘은, 도쿄에서 먹기로 약속하며.
노을은 나카지마 공원에서 보았다. S는 공원의 전체적인 구조와 심미성을 마음에 들어 했다. 과연 연못 주변으로 우거진 나무라던가, 곳곳에 산재한 공연장이나 건축 유산과 같은 문화 시설이라던가, 도시 생활에 결여되기 쉬운 감성을 채워 주는 요소가 많았다. 내 마음과 걸음은 은은한 주홍빛 하늘을 투영하는 연못과 아직도 한창이던 수국에 오래 머물렀다.
다음 날 아침, 헤어지기 싫은 사람을 두고 떠나는 마음으로 삿포로의 풍경을 눈에 담으며 공항으로 향했다. S와는 국내선과 국제선 중간쯤에 자리한 로이스 초콜릿 팩토리에서 기념품을 구입한 뒤 산뜻하게 헤어졌다.
첫날부터 눈 독 들였던 로이스의 장미 모양 피낭시에는 분명 결제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도쿄에 도착해서 쇼핑백을 열어보니 빠져 있었고, 호텔 방에 하나뿐인 베이지색 카디건과 곱창밴드를 두고 온 사실을 뒤늦게 알아챘다. 그래도 여름, 홋카이도가 내게 준 것이 그보다 훨씬 크고 중하니, 자책은 않기로 한다.
아쉬운 만큼 그리울 것이고, 그리워야지만 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