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oppy Nov 02. 2024

내가 가질 수 없다면 없애버리겠다

내 깊은 마음속 숨겨두었던 애착심리


요즘 내가 느끼는 감정들에 대해서

탐구해 보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긍정적인 감정들보다는 부정적인 감정들이

내면 깊은 곳에서 스멀스멀 올라올 때

내 인성에 대해서 불안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나 혹시 사회부적응자인가? 아니면 인성 파괴자?

그것도 아니면 소시오패스..?”라면서 끝없는 꼬리에 꼬리물기 게임을 시작한다.



예시의 일화를 들자면


나는 운동을 정말 좋아하고 열심히 하는 사람이다.

주변에 나와 비슷한 상황의 누군가 나에게

”당신에게 자극을 받고 운동을 열심히 한다 “며

내게 고맙다고까지 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 사람이 더 열심히 하고

내가 원하는 결과를 더 빨리 얻어냈다.


나는 그 상황에서 갑자기 운동이 싫어지고

 열심히 하고 싶지가 않다.

(아예 다른 것으로 관심사를 돌려버린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스스로를 못되고 성격이 이상한 사람이라고

취급하고 말아야 하는가?

(사실 이전 삶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인성이 못돼 먹은 인간이라서

 그런 거라고 나 스스로를 욕했다.

그런 감정을 느낀 것 자체를 질책했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내게 한 번도 물어봐 준 적이 없었다.


그런데 한 번쯤은 내 감정의 이유를 들어봐 줘야

공평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리상담을 받을 때마다 어렸을 때로 돌아가

이유를 찾는 걸 보고

이 문제도 어린 시절로 돌아가서

답을 찾아보고자 했다


대한민국의 첫째로 태어났다면 어렸을 때 귀에 딱지가 생기도록 들었을 말 중에 하나


‘엄마, 아빠가 없으면 너는 동생의 보호자가 되는 거야.

네가 동생을 지켜줘야 해’라는 말.

그 말을 피에 스며들도록 듣고자란 첫째다.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어딜 가나 껌딱지처럼 따라다니고 싶어 하는 동생의 보호자로 역할을 부여받았다.

친구들과 약속이 있으면 동생을 짐짝처럼 달고 나가야 했다.

(지금 생각해도 그 상황들이 생생하게 떠오르면서

부정적인 감정이 떠오른다.

그때는 진심으로 동생을 최대한

 먼- 곳에 갖다 버리고 싶었다.)


우리 집은 '첫째는 양보하는 사람'이라는 가훈이 있었던 것도 아니면서 내가 아끼는 물건을 동생이 가지고 싶다고 하면 뭐든 무조건 그날로 양보해줘야 했다.

“네가 언니니까 양보해야 돼”

나는 그 말이 닭살 돋도록 싫었다.

내 영역을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양보를 한다고 해도 적절한 보상이나, 대가는 없었다.

비자발적인(강제성이 뚜렷한) 봉사 같은 걸 하는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어른스럽다", "대견하다"는 칭찬세례에

못 이기는 척 몇 번 내 물건을 선뜻 내놓았는데

그것도 하루이틀이지 내 애착이 있는 물건들마다 갈취하려 하는 동생을 보고 있노라면 눈이 뒤집히게 되었다.


그때부터였다. 내가 가지지 못하는 물건은 바로 애착을 쓰레기통에 갖다 버리는 습관이 생긴 것이.


약간 파괴적인 모습까지 보였는데

쉽게 애착을 버리지 못할 물건들은

 내가 더 이상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예를 들에

1. 동생이 내가 정말 좋아하는 스케치북을

가지고 싶다고 한다

2. 부모님의 양보하라는 압박이 가해진다

3. 동생은 당연한 듯 내가 양보하기를 기다린다

4. 나는 주기 싫은 스케치북을 찢어버린다

(=물건의 기능이 상실되고 내 애정이 식는다.

결국 동생은 내 물건을 빼앗을 수 없다)


그렇게라도 내 상처받은 마음을 보호해야 했다


그 시절을 다시 떠올리기만 하면

 아직도 깊은 속에서부터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내 물건들.

 내가 아끼는 것들은 다 그렇게 빼앗겼다.


 그렇게 쉽게 양보해도 되는 것들로 취급당했을까.

어린아이도 자신만의 고유한 영역이 있고,

지키고 싶은 것이 있는 건데 말이다.


세상에 나오는 순서에 따라

 양보의 양을 지정한다는 어이없는 불평등의 구조라니.


첫째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건 아닌데

내가 뭔가 뽑기 게임을 잘못한 것처럼

무척이나 억울한 느낌이 들었던 인생이었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운동에 애정이 짜게 식은 나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놓고 살펴보자면

나는 운동을 나만이 소유한 ‘물건’으로 생각했다.

누군가가 나의 것을 빼앗아가고 나는 그걸 양보해야 하고,

 내 몫이 사라진다고 생각한다.(마치 제로섬 게임처럼)


*제로섬 게임이란?

게임에 참가한 모든 참가자들의 점수를

전부 합치면 반드시 영(zero, 0)이 되는 게임이다.

즉, 누가 얻는 만큼 반드시 누가 잃는 게임을 말한다.

모든 이득은 다른 참가자에게서만 얻을 수 있다.


그렇게 상대가 내가 원하는 무언가를

쟁취했다고 보일 때 나는 내가 받았어야 하는 물건을 갈취당했다고 여기고 상대방을 미워하게 된다.

사랑했던 물건을 도난당한 것 마냥 괜히 미워지고 질투하면서 그 일 자체에 대한 애정을 버리려고 준비를 한다.


서로 윈윈 할 수 있는 구조임에도

나 혼자 싸우고, 지고를 반복하다가

제풀에 지쳐서 떨어져 나가는

어이없는 1인 시합을 하면서 살았던 거다.



이렇게 적어두고 보니 참 피곤하게 살았구나 싶다.

앞으로 내가 가져야 할 생각, 가야 할 방향을 정리해 보자.


 타인이 내 것을 빼앗는 게 아니다.

내가 내 것을 정당한 대가로(노력으로) 얻는 삶을 살 수 있다.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고, 지켜낼 수 있다.

주변의 사람들도 같이 성장할 수 있는

서로 이기는 게임을 하고 있다.

이것은 현재의 나에게 거는 최면이자,

미래의 내가 과거의 삶을

복기하면서 써 내려간 일기이다.






같이 이기는 사회.

그런 사회를 만들고 싶고, 결국에는 만들 것이다.


문제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게 부끄럽고. 수치스럽지만.
스스로가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기 시작했다는 것에 대해 아주 큰 점수를 주고 싶다.


불편하거나 고통스럽다는 건 기존에 익숙했던 것과는

다른 새로운 행동을 취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재미없는 글을 여기까지 읽어주고 있는 당신에게

앞으로도 이런 불편한 이야기를 종종 꺼내 보려 한다.


이런 이야기들이.
또 다른 누군가의 삶에

나타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오늘도 솔직하게 글을 적어본다.

작가의 이전글 바람도 유전이라는 사실 알고 계셨습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