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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동 사세요? -8

내 눈을 바라봐.

by 이믈

개인적으로, 나무 위에 내린 눈이 가장 예쁜 눈이라고 생각한다.

아내의 눈을 빼면.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


(본래 대사는 Here's looking at you, kid. 마치 "간나새끼래 내가 니 지켜보갔서" 같은 느낌이다.)


개인적으로,

"개인적으로"라는 말로 시작하는 글도 싫어하고

중구난방으로 흩어지는 시작도 싫어한다.

그저, 아내가 피식 웃어줬으면 하는 바람으로 바람에 쓸려 흩어지는 싸라기눈 같이 시작한다.




첫눈은 성수동에도 내렸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은 눈이 내려도 금방 녹는다. 팥빙수 먹고 바닥에 남은 팥색 얼음처럼 철퍽철퍽 발을 붙든다. 평소의 성수동보다 한결 적은 사람만이 힘겹게 발을 떼낸다.


연무장길에는 나무가 없다. 이리저리 얽힌 전선이 그나마 눈이 내려앉을 수 있는 쉼터다.

한 골목만 뒤로 돌아서면 솜털 고이 앉은 나무들이 눈에 들어온다. 원래 동네 구경이란 가장 사람 많은 곳에서 한 골목만 벗어난 발걸음이 가장 즐겁기 마련이다.

물론, 한 골목 잘못 벗어나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도시도 있다. 소문 속의 브루클린은 골목을 돌아서면 총을 뒤춤에 찬 갱단이 기다릴 것 같지만, 사실 소문과 사뭇 다른 경쾌한 곳이라고 한다.

성수동은 골목을 돌아서면 총은 없지만, 담배를 문 사람들이 있다. 마치 동네가 거대한 재떨이가 된 것 같다. 성수동에서 담배를 피우면 맛있다고 소문이 난 것일까. 마치 사람들이 담배 피우는 것을 목적으로 성수동에 오지 않는 한 이렇게 많은 꽁초가 있을 리 없다. 꽁초로 무엇이든 수익을 낼 수 있는 요소가 있다면, 성수동에서 사업을 하면 될 것 같다.


나무를 정돈되게 심기 위해 흡연실을 철거했다. 덕분에 좀 더 정돈된 나무 위의 눈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담배가 한쪽으로 치워진 곳에서, 덜 정돈된 나무 위의 눈을 보는 것이 더 즐거웠을 것이다.


어쨌든, 성수동도 담배만 아니면 골목골목이 즐거운 동네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예상하기 어려운 가게들도 보인다. 설마 담배 자욱한 너구리굴은 아니겠지. 맛을 상상하기 어려운 메뉴를 과시하는 가게도 있다. 의외의 가게가 오래가고, 꼭 가보겠다고 혹은 다시 가보겠다 다짐한 가게가 며칠 후 없어져 있다. 세트장 같은 성수동이다. 영화 장면 하나를 찍고 돌아서면 배경을 바꿔야 하는, 성수동 세트장.


그리고 성수동 주민 우리는, 세트의 일부인 엑스트라 정도.

난 행인 14.

<행인 14, 주인공 뒤를 지나쳐 간다.> 정도의 지문이 주어져 있다.


어쩌면 엑스트라보다 주인공이 더 많은 영화를 찍는 세트장, 성수동에 놀러 오세요.

담배는 꺼주시고요, 꽁초는 제발 바닥에 던지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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