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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동 사세요? -10

과민한 장님

by 이믈


장 트래볼타.

사실 존 트래볼타지만, 장 트러블로 고생하는 동지들에게는 장 트래블타로 통하는 그 이름.

그렇다, 난 대한 장 트래볼타 연합회 회원이다.


나의 장님은 매우 과민하신 나머지, 심각한 위기에 처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서 어디를 가든, 신호 비스므리한 것이 느껴지면 일단 화장실을 찾는다. 자주 가는 곳이라면 화장실 위치와 비밀번호를 외워두는 것 역시 필수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지만, 나 자신만을 알아서는 싸움을 이길 수 없다. 환경까지 완벽히 연구해야 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위기를 맞이하는 것이 장 트래볼타인의 숙명이리라.


그래서 언젠가 성수동의 화장실 위치를 파악하여, 성수동을 방문하는 장 트래볼타 회원 분들에게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성수동은 매우 낡은 곳이라, 화장실 찾기가 쉽지 않다. 하긴 새로 만든 건물들은 화장실 찾기는 쉬워도 모두가 화장실에 보물을 쌓아두고 사는지 보안이 철저하다. 요즘 화장실 인심이 참 각박하다. 차라리 입장료를 받으시라. 급하면 얼마든지 내고 쓸 테니.



급하면 규모가 큰 건물의 지하 주차장으로 가셔라. 좀 큰 건물 지하주차장은 화장실을 갖춘 곳이 많다. 그리고 굳이 잠가두지 않는다. 오피스텔 건물은 공동 현관 열기가 어려우니 시간 낭비 하지 마시길. 당신의 장은 1초가 아쉽다.


일본 여행을 갔을 때 한국 여행객들이 많이 보이는 약국에서 가장 먼저 산 것은 단 몇 초 만에 급똥을 가라앉혀준다는 명약이었다. 막상 사놓고 들고 다니질 않아 실험해보지 못했다. 지금껏 가장 유용하게 쓰고 있는 것은 스멕타. 물 없이 짜 먹어도 되는데, 효과가 꽤 좋다. 중요한 자리엔 챙겨 다닌다.


img.jpg 알러지 환자를 살리는 에피네프린, 장 트래볼타를 살리는 스멕타



세상에는 과민성 대장 증후군으로 고생하는 동지들이 참 많지만, 일상생활에서는 도무지 그 동지들의 존재를 확인할 길이 없다. 아마 사고가 나면 부끄러워 죽어 버렸으리라. 다만 마피아 게임에서도 서로를 확인할 수 있는 밤이 있듯이, 화장실에서 과민한 장을 가진 마피아들이 고개를 들어 동지를 확인하는 시간이 있긴 하다. 다만 문을 열고 나와서 굳이 얼굴을 보고 싶진 않다. 눈이 마주쳐도 모른 척해야 하는 진정한 마피아의 세계.


그러다 보니, 장 트래볼타로 사는 것은 매우 외롭다. 장 트래볼타 협회에서 전국적인 캠페인이라도 해줬으면 좋겠다. 그 어떤 화장실이라도 열 수 있는 회원 카드 발급, 목숨과 바꿀 수도 있는 갓길 드래그 레이싱 허가, 좀 심하면 사이렌이라도 울릴 수 있게 해 주면 얼마나 좋을까.


외롭게 괴로운 것은 억울하다 보니, 누군가의 장에 트래볼타 빔을 쏘고 싶어질 때가 있다. 성수역은 지상역인지라, 그 아래에서 굉음을 내며 달리는 오토바이들은 눈꼴 실 수밖에 없다. 다른 데 가서 놀아라. 왜 하필 여기냐. 물론 더 시끄러우면 너네야 더 즐겁겠지만, 성수동 주민은 무슨 죄냐. 에잇, 이놈들. 트래볼타 빔이나 맞아라! 삐용삐용!

배달해야 되는데 급똥 신호가 와서 화장실 찾다가 늦어버려라!

스포츠카 뚜껑 열고 여자 친구에게 멋진 척하다가 갑자기 차를 세우고 달려라!


어쩌면 누가 날 해코지 하기 위해 빔을 내게 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난 그렇게 남을 못살게 굴진 않았던 것 같은데.


아 과민한 장님이시여, 내게 평화를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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