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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Joon May 12. 2022

자발적 출혈이 주는 기쁨

호주에서 헌혈하기

오랜만에 피를 흘렸다. 그것도 아주 시원하게 많이. 내 의지와 관계없이 흘려댔던 군대 시절과는 달랐다. 가득 찬 내 피를 보고 나도 웃고 뽑아주신 간호사도 웃었다. 칼이나 종이에 조금만 베여도 기분이 많이 안 좋은데 참 마음먹기 나름이다. 그렇게 이 먼 곳 호주에서 처음으로 헌혈을 하고 왔다.


무언가 나누기를 좋아하고 잘하는 파랑을 만나 이런저런 나눔을 배웠다. 연애시절부터 해오던 금전적인 기부는 지금까지도 여전하다. 우리에게 좋은 일이 생기거나 어쩌다 예상보다 더 많은 것들이 들어오면 꼭 일부는 떼서 기부한다.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고 괜히 배가 아팠다. 저거 다 내 돈인데, 다 우리 돈인데. 습관은 무섭다. 이젠 아무렇지도 않고 안 하면 허전하다.


헌혈도 군대에서만 열심히 하다가 사회에 나와서는 멈춰있었다. (100% 타의는 자의를 만들지 못한다) 파랑을 만나서 헌혈도 다시 하게 되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파랑은 나와 같이 일반적인 전혈 헌혈을 할 수 없는 체질이다. 오로지 혈장(플라스마) 헌혈만 할 수 있다. 둘의 과학적인 차이는 패스하고 가장 큰 차이는 헌혈 시간이었다. 혈장 헌혈은 1시간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다. 신혼 초 까지 몇 번 해오다가 시간도 오래 걸리고 아기도 생기면서 그 후로는 까맣게 잊고 지냈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이곳에서 파랑이 헌혈을 함께 하자고 했다. 너무 오랜만이라 생소한 단어였지만 어떤 마음인지 알기에 선뜻 동의했다. 마음이 모아지자 다음은 척척이었다. 말이 나온 그날 바로 예약을 하고 다음날 헌혈을 했다. 기분 좋았던 그 시간들을 남겨 놓는다.




호주 적십자 회원 가입 및 헌혈 예약


모바일로 아주 간단하게 진행했다. 호주 적십자 사이트에 방문해서 등록 후 로그인했다. 가까운 헌혈 센터로 원하는 시간에 예약을 했다. 예약 전에 기본적인 사항 (아팠는지, 약 뭐 먹는지 등)을 체크한다. 완료가 되면 예약이 확정되고 컨펌 이메일을 받을 수 있다.



호주 적십자 홈페이지




헌혈 센터 방문


들어가는 입구부터 불긋불긋 괜히 가슴을 기분 좋게 뛰게 만들었다. 끌려가서 동원 대던 군대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역시 무엇이든 자발적인 것이 사람을 살아있게 만든다고 해야 할까?



헌혈 센터는 매우 쾌적했다. 여느 식당들이나 가게보다도 훨씬 훨씬. (많이 놀랐다) 들어서자 리셉션에서 친절한 직원분께 예약 확인 및 사전 안내사항을 전해 들었다. 난 다른 것 보다도 이곳 스낵바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푸짐하고 다양했다. 무엇보다도 헌혈 전후에 잘 먹어야 한다고 열심히 알려주는 내용이  좋았다. 전혀 죄책감 가질 필요 없이 건강한 헌혈을 위해 내 몸에게 주는 영양 공급원이라는 생각을 갖게 해 줬다. 그래서 시키는 대로 열심히 골고루 다 먹었다. (이런 나를 파랑은 놀라워했다고, 아침을 방금 먹고 왔는데...)



안내가 끝나자 직원분이 관련 설명서를 주며 읽어보길 권했다. 먹을 것이 있었기에 간식 먹으며 책 읽듯이 읽었다. 다 읽을 때쯤 혈관을 체크하기 위해 간호사가 내 이름을 부르며 찾아왔다. 내 팔뚝의 혈관을 보자마자 놀랐다. 완전 베리 굳 혈관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몰랐다. 혈관이 다 똑같은 거지 좋고 나쁘고 가 있을까 해서. 그냥 기분 좋으라고 하시는 말씀인 줄만 알았다. 헌혈하는 사람 띄워주시려고. 하하.


자리로 다시 돌아오니 내게 태블릿이 주어졌다. 이건 또 뭔가 했다. 아주 디테일한 질문이 이어졌다. 아마 처음이라서 더욱 자세했던 것 같다. 42문항에 열심히 답변했다. 파랑은 옆에 사전을 두고 했고 나는 느낌으로 했다.(나름 생물화학 전공자) 드디어 끝내고 질문 완료 거치대에 태블릿을 가져다 놓았다. 이제 피를 뽑으려나 싶어 하는 찰나에 담당 간호사가 내 이름을 불렀다. 헌혈 침대가 아닌 방으로 나를 데려가셨다. 내가 답변한 질문들을 토대로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페니'라는 간호사분은 최고로 친절했고 편안하게 해 줬다. 심지어 내 영어를 모두 알아들었으니 완벽한 이해 주의자가 틀림없다. 즐거운 수다에 가까운 시간을 보내고 드디어 피를 밖으로 꺼낼 순간을 맞이했다.


Lifeblood Maroochydore Donor Centre




호주에서 첫 헌혈 성공


간호사가 내 혈관을 보더니 다시 놀라며 말했다. 완전 A 플러스 혈관이라고, 다음에는 꼭 플라스마(혈장) 헌혈해보라고. 이번에는 물어보았다. 왜 좋은지. 굵고 선명해서 피를 뽑기 좋다고 했다. (헌혈 세계에서는 최고의 칭찬) 괜히 뿌듯한 마음으로 헌혈을 시작했다. 정말 짧은 시간이었다. 내 혈관이 좋아서 그런 건지 기계가 좋아져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내게 빠져나온 피의 양에 내가 놀라니 마무리해주던 간호사가 말했다. "걱정 마, 아직 엄청 많이 네 몸에 남았으니까!"


한 5분 정도 누워있었는데 끝났다. 그동안 생각한 것은 사전에 내게 진행된 질문 단계가 몇 번이었나였다. 무려 5번이었다. 예약할 때, 리셉션 직원께서, 사전 안내문 읽으면서, 태블릿 질의응답, 간호사 인터뷰. 어마어마한 디테일에 놀라며 스낵바로 돌아왔다. 플라스마 헌혈을 하고 있는 파랑을 기다리며 아까 다 못 먹은 음식을 마구 먹었다. 생각보다 금방 파랑이 돌아왔다.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 모양이다. 이제 시간이 문제가 될 일은 없어 보였다.



안내받은 Donate Blood App을 설치했다. 내 헌혈 기록과 다음 예약을 편하게 할 수 있었다. (눈부신 '1') 마치고 나오는 길은 괜히 많이 뿌듯했다. 친절하고 큰일을 한다고 우쭈쭈 해주는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헌혈 후 잘했다고 칭찬해주는 말들도 듣기 좋았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에게도 우리가 헌혈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들은 자기는 언제 할 수 있냐고 물었다. (아직 어려서 불가) 세상에 필요한 활동이라는 것을 이해한 눈치였다. 이곳에 머지않은 시기에 다시 찾을 것이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강한 확신이 좀 길어지는 중)



보다 진한 로 나누는 또 다른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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